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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Feb 14. 2021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수영’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웹 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한수영’이다.


 사실 처음에는 한수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초반에 주인공 일행을 방해하는 역할인 데다 도덕적이지 못한 부분이 드러나 악역으로 조형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표절작가’라고 언급까지 되면서 내가 한수영을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점점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한수영이 점점 내 눈에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생각하는 등장인물이기 때문에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나에게 공감 가는 요소가 많았다. 다른 인물들이 독자이고, 주인공이고, 등장인물이었다면, 한수영은 ‘작가’였다. 그래서 작품의 독자들이 한수영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에. 그냥 뻔한 트라우마야.”
 “……뻔한 트라우마가 어딨냐? 트라우마는 다 심각한 거야.”


 내가 한수영을 처음으로 관심 있게 보게 된 장면이다.

 주인공인 ‘김독자’는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송민우’를 만나 고전하게 된다. 변한 세계에서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그보다 더 앞질러가던 김독자가 갑자기 고전하는 것을 보고 한수영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리고 금방 김독자와 송민우가 어떤 관계였는지 눈치챈다. 그런 한수영에게 김독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한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앞서 말했지만, 한수영은 주인공 일행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나마 주인공인 김독자와는 변한 세계의 기반이 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통칭 ‘멸살법’)을 읽었다는 공통점으로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마저도 둘은 자주 말다툼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한수영이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한수영이라면 고작 그런 일에 정신이 흔들리는 것이냐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다정하지는 않아도 김독자에게 위로가 될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새삼 다시 한수영을 보게 되었고, 한수영의 행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김남운’을 기용했냐는 내 질문에, 1863회차의 한수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나쁜 인간’으로 태어나는 인물은 없어. 전부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것뿐이야.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도록 서사를 준 거라고. 난 그게 맘에 들지 않았어.


 김남운은 ‘멸살법’ 내에서 나쁜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멸살법’ 초반에 생명을 죽이라는 미션이 있었는데, 그 미션을 실행하기 위해 살인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고 묘사되었다고 한다. 멸살법이 현실이 된 실제에서도 김남운은 똑같이 행동했고, 김독자는 그가 미션을 실패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김독자가 ‘명계’에서 김남운을 보면서 한수영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언젠가 나는 선한 역할의 등장인물보다 악한 역할의 등장인물을 더 좋아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악한 등장인물이 선한 등장인물에게 지는 것이 싫었고, 그 악함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악한 등장인물에게 그 악함의 이유를 찾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악함의 이유를 찾았다고 해도 그 등장인물이 악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들이 싫어하는 등장인물에게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이 등장인물의 장점을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 인물이 현실에 나타나면 정말로 이렇게 행동할지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어떤 등장인물은 현실에서도 그렇게 행동할 것 같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등장인물을 찾았을 때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수영의 말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한수영을 초반에 좋지 않게 생각하던 것 역시 작가의 설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한수영은 초반에 ‘나쁜 인간’으로 보이는 등장인물이었다. 그런 한수영을 나쁘다고 말하기도 쉬웠고, 미워하기도 쉬웠다. 미워할 만한 이유를 작가가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한수영도 결국 처음부터 나쁜 인간으로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서사를 작가에게 받은 것에 불과했다. 한수영은 작품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 행적으로 독자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보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네가 읽을 수 있는 건 고작 작가를 통해 쓰인 이 글들뿐이지 않으냐고. 그 글로 한수영을 읽고, 공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역이었을 리 없는 한수영을 차근차근 알아가게 되었다.


 -작가는 자기가 쓴 글 속에서 정말 전지전능한 걸까?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너는 글을 쓰면서 모든 걸 통제하는 거야? 이 인물은 이렇게 움직이고, 저 인물은 저렇게 행동하고……
 -그야 당연히……

 자신만만하게, 한수영은 선언했다.

 -통제 못하지.
 -왜? 작가잖아.
 -작가가 진짜 신인 줄 아냐?
 -이야기 속의 모든 건 작가가 만드는 거잖아. 상황도, 인물도……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만, 하고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등장인물은 만들어 놓는 순간 제 맘대로 움직여. 작가는 그냥 무대를 제시할 뿐이야. 그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일지를 선택하는 건 등장인물들이라고.


 한수영은 ‘이야기의 적’이 되어 살해 대상이 된 김독자를 보며 생각한다. 그녀는 그가 어째서 이야기의 적이 되는 것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그녀는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게 된다.


 소설을 어쭙잖게라도 한 번 써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단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분량이 있고, 꼬박꼬박 써야 하는 중장편을 써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학창 시절에 취미 삼아서 인터넷 소설을 쓸 때, 친구들에게 어떤 등장인물이 나오면 좋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의 요구에 맞춰서 적당한 등장인물을 만들고 내가 쓰는 소설에 등장시키면 친구들은 무척 좋아했었다. 그런 등장인물 중 인상 깊은 등장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쓰는 소설의 여자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남성 등장인물이었다. 별생각 없이 일회용으로 등장시키려고 했던 등장인물이 소설을 쓰면 쓸수록 소설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다녔다. 정신 차리고 쓴 글을 읽어보니 엑스트라가 아니라 새로운 비중 있는 등장인물의 등장 파트에 가까운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것을 친구에게 말하니 글을 쓰는 사람은 너인데 어째서 등장인물에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랬다.

 등장인물은 이런 점이 참 묘했다. 내가 만들어냈는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만든 무대와 이야기 앞에서 등장인물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해서 작가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나는 그래서 가끔 짧은 이야기를 쓰게 되면 결말을 정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행복한 결말을 내고 싶다고 해도 등장인물의 행동이 파국으로 치닫기도 했고, 내가 슬픈 결말을 내고 싶다고 해도 등장인물이 그것을 거부해 있는 힘껏 세상에 도전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 이 점은 작가 역할을 하는 한수영 또한 알고 있었다. 아주 친한 친구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등장인물을 발견한 것은 나에게 무척 기쁜 일이었다.


 -작가님이 써준 이야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유일한 독자의 말을 읽으며 한수영 또한 살 수 있었다.
 유중혁의 다음 생을, 가까스로 쓸 수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10대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 날들을 다시 한 번 견딜 수 있었다.


 한수영은 김독자를 위해 글을 썼다. 김독자가 그녀에게 남기는 댓글을 보면서 자신의 생을 살고, 주인공의 다음 생을 써내려갔다. 언젠가 한수영은 그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고 말했었다. 3천 편이 넘을, 재미도 없는, 김독자가 말했던 로맨스 장르는 아닌 소설을 꾸역꾸역 써내려갔다. 그녀가 글을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단 하나뿐인 ‘독자’ 때문이었다.


 어릴 때 인터넷 소설을 쓴 경험이 있으니 나도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다.

 인터넷 소설 특성상 초반에는 눈길을 끄는 제목과 크게 흥미가 있을 법한 이야기 전개를 하면 조회수가 다른 회차보다 잘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뒤로 갈수록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어릴 때 글을 쓴 것이기도 해서 이야기의 큰 뿌리가 없었다.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글을 써서 뒤로 갈수록 엉망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리고 학교생활을 하고, 학원에 다니는 데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뿐이어서 연재 주기도 들쭉날쭉했다. 그러니 내 글을 보고 싶어서 오려는 독자도 내 불규칙한 연재 주기를 따라가지 못해 하차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것이 익숙했고, 내가 쓰던 이야기를 쉽게 포기했다. 애초에 그 당시에 유행하는 인터넷 소설 흐름을 편승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이야기에 애정이 없었다.

 그런 내가 쓰는 글을 꾸준히 찾아주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내가 연재가 불규칙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주인공들이 이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 나와 소통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댓글에 답을 일일이 다는 편이 아니라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댓글 때문에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글을 썼다. 불규칙하기도 했고, 조잡한 글이기도 했지만 50편이 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그 사람의 축하 인사를 들었다. 그 뒤로 학교생활이 더 바빠져서 연재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지금 이 지면을 빌려 나조차도 사랑하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사랑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내 이야기를 소중하게 여길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한수영이 하나뿐인 댓글로 간신히 삶을 견디고, 자신의 글을 버티고, 이 이야기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독자를 위해 절절하게 쓴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와 닿게 느끼기도 했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숨기는 사람 역시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나도 내가 어디 가서 글을 쓴다고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주변에 마땅한 이해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동류의 사람인데, 이상하게 주변에서 글 쓰는 사람을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한수영이란 존재는 충분히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인물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한수영에게 당연히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수영은 당신에게 이 비극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당신이 쓴 뛰어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혼을 바쳐 완성한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고 말해줄 것이다. 글에 쓰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비극을 알아 더욱 괴로워할 수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충분한 위로였고, 당신에게도 힘이 될 것을 알기에 이 웹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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