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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ve Jan 23. 2021

빙의 버프 없이 행복을 쟁취하는 ‘리플리’

웹 소설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를 읽고

* 인용글은 모두 웹 소설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웹 소설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리플리’일 것이다.


 이 웹 소설은 흔히 말하는 ‘빙의물’ 장르이다. 다른 캐릭터에 주인공이 말 그대로 ‘빙의’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런 빙의물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의 여자 주인공은 하나 정도 출중한 능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인 편이다. 그렇지만 애석히 ‘리플리’는 그런 능력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리플리의 매력이 대체 무엇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시원시원한 사이다 같은 여자 주인공이 인기가 많은 만큼 능력도 없이 사랑만을 쟁취하는 캐릭터가 어떻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다. 적어도 리플리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누가 악녀 아니랄까 봐, 저렇게 뻔뻔하게…….
 자, 잠깐.
 나도 악녀가 될 거라고 결심했었잖아?
 그럼 나도 더 뻔뻔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쟤요."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려, 당당하게 로제를 가리켰다.
 두 쌍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한 번 보고, 이어 나를 쳐다보았다.
 "쟤가 때렸어요."
 나는 당당하게 고자질을 했다.


 리플리는 원작과 다르게 남자 주인공인 ‘제로니스’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 그것을 막아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 중 그녀는 악녀가 되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악녀는 결국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플리는 파티장 파우더룸에서 자신을 견제하러 온 악녀 ‘로제’에게 어떻게 하면 악녀처럼 굴 수 있는지 물어봤다가 뺨을 맞게 된다. 그 때문에 뺨이 부어서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간 리플리를 제로니스가 발견한다. 그는 어디서 뺨이라도 맞고 왔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로제는 설마 리플리가 그에게 맞았다고 고하겠나 싶었지만, 리플리는 당당하게 로제가 때렸다고 선언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리플리의 매력은 솔직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악녀가 될 것이라는 결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리플리가 백작 영애인 것을 제외해도, 사실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 관해 솔직하기 어려운 사람이 제법 많을 것이다. 내가 맞았다는 걸 어디 가서 이야기하기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리플리처럼 다른 사람들이 많은 파티장에서 내가 맞았노라 당당히 말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예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 가장 인상 깊은 진상 남자 손님이 있었다. 내가 일하는 카페는 작은 카페라 혼자서 일할 때가 많은 곳이었다. 그 카페의 특이한 점을 하나 꼽자면 물을 따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물을 제공하지 않는 가게였다. 보통 처음 오는 손님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주문하기 전에 설명하는 편인데, 그 설명을 듣고 그 손님은 왜 물을 안 주느냐며 노발대발했다. 나보다 덩치도, 키도 큰 손님이 난리를 피우는데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쏟아졌었다. 다행히 같이 온 일행들이 말려서 나에게 큰일은 없었지만, 나는 그날 온종일 빨개진 눈으로 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자신의 부당함에 끙끙거리는 것보다 시원하게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 말하는 리플리가 좋았다.


 "공작님을 그만 포기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뭐라고요?"
 "전, 당신이 당신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 목매는 삶이 아니라, 무언가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본인이 길을 개척하는 삶이요."


 리플리는 친구인 ‘에트와르’의 부탁으로 로제의 가문에서 열리는 선수식에 참석하게 된다. 로제는 또다시 리플리의 앞에 나타나 제로니스에게 멀어지라고 위협한다. 리플리는 그것을 거절했고, 로제는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배에서 리플리를 밀어버린다. 덕분에 리플리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지만, 본인의 수영 실력과 제로니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조된다. 이후 리플리는 로제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그리고 조언처럼 로제에게 제로니스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원작의 내용이 이미 바뀌었으니 로제 역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나는 리플리가 자신을 죽일 뻔한 로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라 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거기다가 리플리는 세계관 내에서 황제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가진 제로니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로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며 감옥에 가두라고 하는 게 어쩌면 더 편할 텐데 리플리는 그러지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를 요청했고, 로제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기는 어렵다. 그런 말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그냥 그렇게 살아라’ 하고 포기하는 쪽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포기하는 쪽이었다. 나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내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굳이 조언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그렇게 살다가 언제 한 번 제대로 망할 거다.’ 라고 속으로 저주 비슷하게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아마 나에게 로제처럼 살인미수 수준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면 옳다구나 하고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이나 가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나를 만나 선처를 구하려 한다고 해도 절대로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내 인생에서 다시는 안 보일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리플리는 그런 나와 달라서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제가 되고 싶었던 건 공작 부인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남자의 부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죠."
 나는 잡고 있던 에트와르의 손을 라이트에게 건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에트와르의 손을 잡았고, 따스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 주었다.
 "후작 부인은 잊으세요. 지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세요."
 최면술사에 홀린 사람처럼 에트와르는 내 말대로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라이트는 생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에트와르의 굳었던 입술에도 살짝 미소가 머금어졌다.
 연쇄 작용처럼 그 미소를 보며 라이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고, 에트와르의 얼굴에는 핑크빛 홍조가 어리었다.
 "운명은 반지가 정하는 게 아니라, 에트와르 님이 정하는 거예요."


 에트와르는 자신이 본래 출신이 고아라는 점을 들어 자신을 사랑하는 ‘라이트’ 소후작의 프러포즈를 거절한다. 자신은 라이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에트와르에게 리플리는 자신과 제로니스의 이야기를 하며 에트와르에게 진지하게 조언한다.


 이전에 리플리는 에트와르에게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는 제로니스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리플리의 말에 에트와르는 원래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런 조언을 들었던 리플리가 에트와르에게 조언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예전에 그 사람을 좋아할 때, 내가 여유가 없기도 했고 스스로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 사람은 나보다 잘난 구석이 너무 많았고, 나는 못난 구석이 너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좋은 결과도 얻지 못하고 지금처럼 좋은 관계조차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수도 없이 고민하던 밤이 내게도 있었다. 당시에 누구에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지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리플리가 한 조언 같은 말을 들었다면 나는 아마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주변 상황은 일단 놓고,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지난 추억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웃을 수 있다. 하지만 가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조언을 해주는 리플리가 괜히 고마웠고, 에트와르와 라이트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에 무척 기뻤다.


 리플리에게는 특별한 능력은 없다. 뭔가를 잘 만들지도 못하고, 똑똑하게 상황을 헤쳐나가지도 않는다.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작중에서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런 평범한 리플리가 주인공이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타인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리플리를 보면서 나는 언제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 본 적이 있었나, 언제 이렇게 절절하게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리플리의 행적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아주 사랑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리플리의 행적을 보며 용기를 얻길 바라게 되었다.

 이 웹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용기를 가지고 리플리처럼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리플리처럼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아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침내 인생에 도래할 해피 엔딩을 움켜쥐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웹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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