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 난세가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소와 원술 2 사람 중의 한 명이 천하를 차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일부 교현과 같은 인물이 조조가 천하를 안정시킬 것이라 말하였지만 200년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원소를 격파했을 때에도 조조는 부하들이 은밀하게 원소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편지들을 발견했을 정도였습니다. 195년 조조가 여포와 연주에서 맞섰을 때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심하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기근이 심각했습니다. 9월이 되자 먹을 것이 없어서 조조와 여포는 어쩔 수 없이 휴전을 해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원소는 조조에게 가족들을 자신에게 보내면 자신이 가족들을 보호해 주고 식량도 지원해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조조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정욱이 강경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원소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조조와 원소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 차이가 있었습니다. 처음 동탁에 반대하며 군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가 조조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곳을 근거지로 삼을 만하겠소? “
조조가 반문했습니다.
”귀공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나는 남쪽으로는 황하를 물막이로 삼고 북쪽으로는 연 땅과 대 땅을 흑막이로 삼으며 오랑캐의 무리를 아울러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서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툰다면, 아마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보오. “
지형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원소에 대하여 조조는 다른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천하의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인재들에게 맡겨 도의로써 그들을 부린다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천하의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인재들에게 맡겨 천하의 민심을 다투는 것이 조조의 이상이었습니다. 유비와 손권이 한때 조조를 따를 수밖에 없던 큰 이유였습니다.
조조의 핵심 참모인 순욱과 곽가는 원래 원소의 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원소 밑에 있다가 그 한계를 발견하고 조조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순욱이 조조에게 오기까지는 이런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조는 늘 온 정성을 다하여 유명한 인재를 구하였습니다.
어느 날 조조는 묘당에 가서 고승을 찾아뵙고 중원에 어느 현인이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나이 많은 승려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어서 조조에게 비단 주머니를 하나 주고 말했습니다.
”중원에 들어간 뒤에 만약 어떤 사람이 나타나 감히 이름을 내걸고 당신을 욕하거든 이 비단 주머니를 보시오. 그러면 알 것이오. “
조조는 비단 주머니를 몰래 간직하고는 대군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중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들어서는 곳마다 개나 닭도 남지 않았고 길을 끊겨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창에 들어서자 이곳이 용이 숨고 범이 누운 명당임을 발견한 조조가 군영을 정돈하고 영채를 펼치라고 삼군에 명령했습니다. 군막은 북문 안의 경복전 사당 안에 설치했습니다.
조조의 아우 조인은 근위병을 이끌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민간에 피해를 끼쳐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흘 뒤 성문 네 곳 위에 턱 격문이 붙었습니다.
<조조가 허창에 이르자 백성이 재앙을 맞았구나. 만약 안녕을 버리고 일을 처리한다면 한나라 왕조는 나라를 평안히 하기 어렵겠구나.>
글 아래에는 ‘허창 순욱’이란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조조는 이 사건을 보고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순욱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문득 고승이 준 비단 주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서둘러 주머니를 열어 보니 종이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입을 여니 한낮이더니, 해가 떨어지자 납작 달이 떠오른다.
열흘에 머리에 풀이 자라고, 혹 자의 옆구리를 세 번 치네.
재주는 옛날 자아를 넘어서고, 계략은 자방과 비슷하네.
수수께끼 시였습니다. 조조는 왼쪽으로도 보고 오른쪽으로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하던 조조는 마침내 그 비밀을 풀어냈습니다.
‘일을 여니 한낮이더니’에서 입을 연다는 것은 말씀 언(言) 자가 됩니다. 한낮은 ‘오(午)’ 자가 되고 언과 오를 붙이면 허(許) 자가 됩니다. ‘해가 떨어자자 납작 달이 떠오른다’에서 해(日)가 위에 있고, 납작 달(月)이 아래에 있으면 창(昌) 자와 비슷하게 됩니다. ‘열흘에 머리에 풀이 자라고’에서 ‘열흘’은 순(旬)이고, 그 위에 풀 초(草) 자를 얹어므녀 순(荀) 자가 됩니다. 혹(或) 자의 옆구리를 세 번 치면 욱(彧) 자가 됩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조조는 매우 기뻤습니다.
‘허창 순욱, 바로 그가 주 문왕을 도왔던 강태공과 한 고조를 도왔던 장량의 재주를 지닌 인물이로구나! 내 반드시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리라.”
순욱은 영천의 영음 땅 사람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조가 지혜롭고도 용맹한 인물이며 또 인재를 중용한다는 말을 듣고, 조조에게 몸을 맡기려고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조조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으므로 이와 같은 글을 써서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한 것입니다.
조조는 곧바로 조인을 보내어 손욱을 모셔 오게 했습니다. 순욱은 일부러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인은 무척 화가 나서 시건방진 순욱을 죽여 버려야 한다고 조조에게 건의하자 조조는 그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 순욱을 죽이는 건 내 팔뚝을 도끼로 내리치는 것이니라. 알겠느냐?”
그때가 바로 음력 섣달이었습니다. 북풍에 이가 시릴 정도였고 물방을 은 바로 곧 얼음이 되었습니다. 조조는 사나운 추위를 무릅쓰고 몸소 말을 몰아 취규가(聚奎街)에 있는 순욱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대문은 잠긴 채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순욱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수염에 고드름이 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규루가(奎樓街)에 있는 순욱의 또 다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지기가 조조에게 말했습니다.
“주인께선 허창으로 사냥을 나가셨는덥쇼.”
조조는 두 군데서 허탕을 폈으나 귀찮아하지 않고 순욱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는 할아버지 산소를 보살피던 순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순욱의 몸가짐이 반듯했습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손자병법. 을 읽느라 고개를 들지도 않았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책이 땅에 떨어지는 찰나 조조는 황급히 달려가 책을 집어다 공경하는 예의를 갖추어 건네었습니다.
“순 공께선 안녕하신지요!”
순욱은 눈을 감고 물었습니다.
“선생께선 뉘시고,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는지요?”
“저는 초군의 조맹덕이라 합니다. 순 공과 함께 한나라의 황실과 천하를 받들고 싶습니다.”
순욱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평범한 백성이라서 나랏일을 모릅니다. 선생께서는 다른 분을 찾으시지요!”
조조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께서 하늘을 씨줄로 삼고 땅을 날줄로 삼아 천하를 다스릴 방법을 가슴에 품고, 나라를 안정시킬 계책을 배에 담고 계신다고 오래도록 들었습니다. 저는 선생이 아니면 모실 분이 없습니다.”
“제가 귀공을 욕하는 것이 걱정되시지 않습니까?”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욕먹을 짓을 했다면 욕을 많이 먹을수록 좋지요.”
그럼데도 순욱은 자신이 다리에 병이 있어 걸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습니다. 조조는 이에 몸소 좋은 말을 끌어오더니 순욱을 부축하여 앉혔습니다. 조조는 순욱을 품에 앉고 경복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조는 원소에게 실망한 순욱과 곽가를 자신의 사람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관도 대전에서 허유가 원소를 버리고 귀순하자 조조가 신발도 신지않고 맨발로 뛰쳐나가 맞은 일은 그 두드러진 예입니다. 조조는 자신에게 반대한 적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태도를 바꾸면 지난날의 적대감을 버리고 그에게 직무를 맡겼습니다. 진림은 관도 대전 이전에 원소를 위하여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조조는 물론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은 환관이며 아버지 조숭은 조등의 양자라고 혈통을 따지고 욕을 했습니다. 조조는 진림의 재능을 아껴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리라. 오히려 그를 사공 군모좨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조조는 적송자와 왕자교가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방술사를 널리 모집하였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식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왕 조조께서 방술사들을 모두 불러들이시니, 감릉에는 감시가 있고 여강제는 좌자가 있고 양성에는 치검이라는 방술사가 있었다. 이들 무리는 간사한 도적을 끼고서 민중을 속이고 요망한 음모를 꾸며 백성을 미혹할까 걱정되어서였으니 따라서 이들을 모아 그런 짓을 못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와 태자부터 내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우스갯로리로 여기고 믿지 않았다.”
오서 <오범전>에 손권이 황조를 공격할 때 오범을 불렀 물었고 관우를 잡으려 할 때 오범을 불렀으며 <유돈전>에는 하늘의 별의 모양이 달라지면 손권은 유돈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고 나와있고 <조달전>에는 손권이 병사를 내어 정벌하러 갈 때마다 으레 조달에게 앞 일을 헤아려보도록 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촉서의 유비의 마지막 부인인 <목황후전>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관상을 잘보는 사람이 목후의 모습을 보고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었던 사실이 그녀가 황후가 되는데 중요한 사실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지만 조조의 경우에는 죽음에 임하면서도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고대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매장이 끝나면 상복을 벗고 자기 부서를 떠나지 마라. 시신을 쌀 때는 평상복을 사용하고 금은보화는 묘에 넣지 마라.” 죽음 앞에서도 조조는 신비로운 이적에 의지하기 보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에 의하여 일을 처리하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