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없는 장비와 관우는 공자를 만나기 전의 자로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무식하고 용감한 동네 건달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장비와 관우가 없는 유비는 자로를 만나기 전의 공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동네 건달이었던 자로는 공자를 만나자 ‘쥐어 패려고’ 했다고 합니다.
자로가 처음 공자를 만나게 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의 능한 것 위에 배우기와 묻기를 더하면 누가 그대를 따라잡겠는가?” 나는 이것을 물은 것이다. “
“배우고 묻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간언을 들어야 착해진다. 이제 사람에게 가르침과 배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든 바로잡고 닦고 갈아야 재목으로 쓰이는 것이다. 인을 어지럽히고 사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으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의 푸른 대나무는 휘지 않고 스스로 곧으니. 이것을 그냥 잘라다가 화살로 쓰면 쇠가죽도 뚫을 수 있다. 천성이 뛰어난 자에게 무슨 배우고 묻기가 필요하겠는가?”
“그 화살 한쪽에다 꿩의 깃털을 붙여다가 깃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다 쇠를 붙여다가 촉을 만들면, 단지 그 쇠가죽을 뚫음에 그치겠는가!”
그러자 자로가 공자에게 두 번 절하고 말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자로가 공자의 제자가 되고 난 뒤 공자가 말하기를
“자로와 같이 다닌 뒤로 내 험담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로가 죽은 뒤에는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다음에, 나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자로의 죽음으로 공자는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 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듬해인 B.C. 479년에 세상을 뜹니다.
촉의 황제가 된 유비도 221년 장비의 도독이 표를 올렸다는 말을 듣자 통탄해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유비도 평소의 장비에게 부하들에 대한 형벌이 가혹하니 이를 고치라는 충고를 했다고 하였는데 장비도 죽고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전인 이릉대전에서도 참패한 다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223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장비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만인지적으로 불린 천하의 맹장이지만 유비에게만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호걸들 중에서 장비를 상대할 수 있는 장수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유비의 최대 위기였던 조조의 형주 침공 당시 장판교에서 단 20기의 부하를 거느리고 조조의 정예부대 호표기 앞에 버티고 있자 조조의 용장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의형제인 장비가 유비를 허탈하게 만드는 큰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었습니다.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가 관우와 함께 원술과 싸우면서 장비에게 후방의 하비성을 맡기고 부하 단속을 맡겼는데 서주태수 도겸의 부하였던 조표는 근처의 여포를 불러 장비의 하비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장비를 몰아내고 유비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실수가 있었지만 장비는 관우와 함께 유비의 믿음직한 의형제로 시종일관하였는데 이런 천하의 맹장인 장비의 마음을 유비는 어떤 리더십으로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정사 <장비 전>에는 장비가 탁군 사람으로 젊어서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을 뿐 장비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무공을 얻게 되었는지와 유비가 어떻게 이런 천하의 맹장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장비는 관우와 함께 무조건 유비의 사람으로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는 그 이유를 유비와 고향이 같았던 장비가 술에 취해 관리인 현위를 패서 초주검 시켰고 현령인 공손찬이 술에 취해 떨어진 장비를 하옥시킨 다음 저잣거리에서 목을 벨 작정이었으나 장비에게 다친 현위를 친족 유원기의 재물로 달래고 현령인 공손찬에게 간청하여 장비의 목숨을 구해주는 은혜를 베푼 덕행으로 설명하고 있고,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찻잎을 구하려다 황건적에게 포로가 되었고, 우연히 만난 노승의 부탁으로 영주의 딸인 부용을 구하려다 위기에 처했는데 영주의 옛 부하였던 장비의 도움으로 살아나면서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유비에게 도축업을 하던 장비가 있다면 한고조 유방의 곁에는 개백정이었던 동서인 번쾌가 있었습니다. 번쾌는 유방의 친구였는데 평소 관상을 잘 보던 유방의 장인 여문이 자신의 둘째 딸 여수를 아내로 주면서 유방과 동서지간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번쾌, 역상, 하후영, 관영의 행적을 번역등관열전에 묶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신분에서 큰 공을 세워 천하의 영웅이 된 인물들입니다.
번쾌는 유방이 처음 군사를 일으켜 패현을 칠 때부터 유방을 수행하였습니다. 설현에서 공을 세웠고 탕현 동쪽에서도 적군 15명의 머리를 베는 공을 세웠으며, 복영현에서도 제일 먼저 성 위에 올라가 적군 23명의 목을 베었고 성양현을 칠 때에도 성을 함락시키고 적군 16명의 목을 베는 등 전투마다 수많은 공적을 여기저기의 싸움에서 거두었음이 사마천의 사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번쾌의 가장 큰 공적은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는 항우의 시도를 무산시키고 유방의 목숨을 지켜낸 일일 것입니다.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던 반란군의 리더는 초나라의 회왕인데 회왕은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자에게 관중왕의 자리를 주겠다고 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진군하면서 마주치는 상대들을 달래가면서 차근차근 거점들을 접수해 가며 먼저 진나라 함양에 입성하였습니다. 당대 천하무적의 힘을 자랑하던 항우는 유방의 함양 입성에 격노하였고 항우의 책사인 범증도 시일을 지체하지 말고 유방을 제거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항우는 유방을 홍문연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유방의 최대 위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항우의 책사인 범증은 유방을 죽이기 위하여 항장에게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찌르라고 사전에 지시했지만 이 위급한 순간에 항백이 유방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때 번쾌는 유방의 목숨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철 방패를 들고 군영 안으로 들어와 연회에 참석하려고 하였습니다. 군영의 보초가 번쾌를 가로막았으나 번쾌는 방패로 보초를 밀어내고 장막 아래에 섰습니다. 항우가 번쾌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 자는 누구인가?”
장량이 대답했습니다.
“유방의 수레잡이인 번쾌입니다.”
항우가 말했습니다. “장사로구나.”
그리고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주고 돼지다리 하나를 내려 주었습니다. 번쾌는 술을 마신 다음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먹어 치웠습니다. 항우가 물었습니다.
“더 마실 수 있겠소?”
번쾌가 말했습니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잔을 사양하겠습니까? 유방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평정한 다음 병사들을 노숙시키며 항우 대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오늘에 이르러 소인배의 말만 듣고 유방을 의심하셨습니다. 신은 이 일로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대왕을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항우는 번쾌의 장중한 기세에 눌려서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유방은 번쾌가 만들어준 기회를 살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유방은 자신이 타고 온 수레를 그대로 남겨 둔 다음 혼자 말을 타고 재빨리 도주하였고 번쾌 등 다른 네 사람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습니다. 유방은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온 다음 장량을 시켜서 항우에게 사과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날 번쾌가 군영으로 달려 들어가 항우를 꾸짖는 용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유방의 목숨은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삼국지에서도 촉의 유장과 한중의 장로에 맞서 형주에서 지원하러 간 유비의 회동 중에 방통이 위연에게 검무를 추도록 하여 촉의 유장을 척살하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장 측에서는 장임이 위연의 상대를 맡아 견제하며 함께 검무을 추었습니다. 이를 보고 눈치를 챈 유비가 “도대체 무슨 짓들이오. 이 자리가 홍문연인줄 아는 것이오!” 당장 그만두도록 하시오! “하고 호통을 쳐서 칼춤을 중지시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번쾌는 유방의 목숨을 구하였고 훗날 좌승상, 우승상을 거쳐 최고위직인 상국까지도 올랐습니다. 말년에 의심증에 빠진 유방이 죽기 전에 번쾌를 제거하겨고 하였으나 진평은 유방과 여태후 양쪽의 눈치를 보며 한고조 유방의 지시를 시간을 끌며 집행을 미루어 번쾌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유방은 번쾌가 여태후의 편을 들어 척희라는 첩의 자식인 유여의를 죽일 것으로 의심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훗날 여태후가 죽은 후 진평과 주발이 반정을 일으키면서 소란 속에 번쾌도 죽게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마천은 번쾌와 하후영처럼 낮은 신분의 인물이 한고조 유방에 붙어 출세한 것을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1,000리를 간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현과 패현으로 가서 진나라 때부터 살아온 그곳 노인들을 찾아 소하, 조참, 번쾌 등공의 옛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물어보았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고 개를 잡고 비단을 팔면서 살아갔었다.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1,000리를 가듯이 한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 줄 알았겠는가? “
사마천이 살았다면 장비가 유비의 사돈이 되고, 장비의 딸들이 유비의 아들과 혼인하여 황후가 되고 후손들이 황손이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평가하였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장비, 번쾌, 자로의 용맹과 유비, 유방, 공자의 리더십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