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라는 난세를 맞이하여 사족들은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보입니다. 영천 순 씨 가문도 원소를 섬기는 순심과 조조를 섬기는 순욱 형제가 있었고, 원소를 섬기는 곽도와 조조가 총애하던 참모인 곽가도 같은 고향 출신의 친척 사이입니다. 원소와 원술도 치열하게 싸웠지만 원술의 세력이 기울어지자 원술은 청주의 원담에게로 가려고 하였지만 조조가 보낸 유비와 주령의 방해로 수춘에서 꿀물을 찾다가 마지막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255년 위나라의 관구검, 문흠은 사마사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각기 오나라에 아들 4명씩을 보냈습니다. 인질 겸 만일의 경우를 후손을 남기기 위한 교토삼굴의 방책으로 보입니다. 제갈량 삼 형제도 첫째 제갈근은 오나라로 둘째, 셋째인 제갈량과 제갈균은 촉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삼국시대에서 제갈 가문의 위 촉 오에서의 활동을 평하여 남북조 시대에 편찬된 세설신어에서는 촉은 용을 얻었고, 오는 범을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오나라에서 원만하게 활동하였던 제갈근과 아비를 염려케 한 재기 넘치는 아들 제갈각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삼국시대의 오나라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나라 손권 가문은 무력으로 급성장한 한미한 가문이다 보니 은근히 호족들의 무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손권의 신하인 장소는 신하였지만 꼬장꼬장하였고 고옹도 명문가이다 보니 성깔이 있었지만 제갈근은 온후한 성격으로 손권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성격이다 보니 손권의 제갈근에 대한 신임이 각별하였다고 합니다. 제갈근(諸葛瑾)의 자는 자유(子瑜)였고 주유(周瑜)의 호는 공근(公瑾)으로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자로 바꾸어 쓸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이처럼 제갈근은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항상 원만함을 유지하였습니다.
제갈량은 47살에 늦둥이 제갈첨을 낳을 정도로 오랜 기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형인 제갈근의 둘째 아들 제갈교를 양자로 입양하였습니다. 훗날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이 오나라의 권신 손준에 의하여 멸문지화를 당했을 때 양자인 제갈교는 죽었고 제갈량은 제갈첨을 얻은 상황이었으므로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은 오나라로 돌아가 끊어진 할아버지 제갈근의 후사를 이어나갔습니다. 촉한과 동오는 조위라는 공통의 강적에 대항하여 우호관계가 이어졌으므로 손권이 제갈각을 군량미를 관리하는 절도라는 직책에 임명하였을 때 제갈량은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어 “형인 제갈근은 연로하고 조카인 제갈각은 거친 성격인데 그에게 군량미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식량보급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나는 사사로이 불안을 느낍니다. 육손 당신이 특별히 폐하인 손권에게 알려 제갈각의 임무를 바꾸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여 손권이 보직을 변경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제갈각의 어린 시절 재기가 넘쳤다는 일화는 풍부합니다. 손권이 장난으로 당나귀의 목에 “제갈자유”라고 명찰을 붙여놓자 아들 제갈각이 “지려(之驢)”라는 글자를 덧붙여 ‘제갈자유의 당나귀’라는 의미로 바꾸자 손권이 기뻐하였다는 일화나 아버지 제갈근과 작은 아버지 제갈량 중 어느 쪽이 현명한가라는 질문에 아버지인 제갈근이 동오를 섬긴다는 이유로 더 현명하다는 대답으로 손권을 기쁘게 하였다는 일화, 손권이 제갈각을 칭찬하며 “남전이 옥을 낳는다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다.”며 현명한 아버지가 재주 좋은 아들을 낳는다는 ‘남전생옥(藍田生玉)’이라는 사자성어 등 여럿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갈각이 변방 단양의 산월족을 토벌하겠다는 건의를 하자 세상 사람들이 산월족의 기세를 염려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로 제갈근은 “제갈각이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 버리겠구나.”라고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제갈각의 건의를 들은 손권은 정예 창기병 300명을 지원해 주며 임명장을 주고 의장대와 군악대를 불러 풍악을 울리며 제갈각이 위세를 떨치도록 도왔습니다. 제갈각은 단양군에 도착한 후 장수들을 요충지에 나누어 배치한 다음 교전을 벌이지 않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단지 수확기에 곡식을 벤 다음 들판에 씨앗 한 톨도 남지 않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산악지역의 주민들은 비축한 식량이 떨어지자 굶어 죽거나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방법은 서부개척시대에 미군이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상대로 썼던 토벌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기병대는 인디언들의 식량자원인 수백만 마리의 들소들을 무차별 도살하면서 식량이 부족해진 인디언들은 막강한 미국 기병대에 정면대결을 벌이다 장렬하게 산화하였고,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은 북해도의 아이누족을 토벌하면서 아이누족의 식량인 곰을 무차별 사냥하여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누족들은 마을을 습격하다 수많은 전사들이 피살되면서 세력이 급락하였습니다.
제갈각은 산월족들이 항복하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조칙을 내렸지만 악행을 일삼던 주유라는 자가 귀순하자 구양현장 호항이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제갈각은 즉시 호항을 참수한 다음 이를 널리 알렸습니다. 눈치를 보던 산중의 주민들은 모두 투항하였고 그 수는 1년 안에 4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제갈각은 이 중 정예병 1만 명을 선발하여 자신의 부곡병으로 삼았습니다. 토착 호족인 육손이 21세에 거느린 부곡병이 8천이었고 아들 육항에게 넘겨준 병사가 4천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병력이었습니다. 서주 출신이었던 제갈근은 오나라의 토착 호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갈근은 가문의 병력이 아닌 황제 손권의 총애에만 의지하던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이제 오나라의 토착 호족 들 입장에서는 외부 세력이었던 제갈 가문이 갑작스럽게 신흥 군벌로 도약한 셈이니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데 아들 제갈각의 성품이 거칠고 급한 성격임으로 장치 가문의 장래를 근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각은 203년에 태어나 253년에 죽었습니다. 252년에 손권이 죽으면서 고명대신으로 임명되어 2년간 오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가 장군 손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면서 가문도 멸족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252년 4월 손권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신임하던 중신 제갈근의 아들인 제갈각을 중심으로 손 씨 혈족인 손홍과 손준, 사위인 등윤, 그리고 창업공신인 여범의 아들 여거를 고명대신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제갈각의 독주를 막으려고 평소 알력이 있는 손홍을 통해 견제시키고 무용이 뛰어난 손준과 중립적인 사위 등윤과 여범을 중간에 배치한 것입니다. 하지만 손권이 죽자마자 중서령 손홍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평소 제갈각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는 손홍은 손권이 죽은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조서를 위조하여 제갈각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손홍은 무위장군 손준과 힘을 합치고자 하였으나 손준은 손홍의 의도를 제갈각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제갈각은 손홍은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처형하고 손권의 장례식을 집행하면서 손량을 황제로 등극시켰습니다. 이어 등윤과 공동정권을 추진하면서 손준과 여거를 소외시켰습니다. 하지만 훗날 253년 제갈각은 손준에게 죽었고, 256년 손준은 위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출정식을 열어주려 여거의 군영에 들어갔다가 위세에 눌려 갑자기 몸이 아프다면서 죽었고, 죽기 전에 권력을 사촌동생 손침에게 넘겨주자 화가 난 여거와 등윤은 반란을 도모했다가 자살로 끝을 마쳤습니다.
제갈각은 야망이 컸으므로 위를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는 큰 꿈을 꾸었습니다. 252년 제갈각은 소호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장기적으로 진격로 및 군량 수송로를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11월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소는 왕창에게 강릉, 관구검에게 무창으로 향하게 한 후 주력군 7만을 제갈탄과 호준의 지휘하에 동흥으로 진격시켰습니다. 위의 대군 앞에서 정봉은 3천의 수군을 거느리고 나아갔습니다. 위나라 장수들은 대병력의 숫자만을 믿고 오나라의 소규모 선봉 부대를 경계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봉은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제방 위의 위군을 기습하였고 위의 대군은 유일한 퇴로인 부교로 도망치다 부교가 무너지면서 수만 명이 몰살하였습니다. 오는 대승을 거두었고 위의 사마소는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패배를 인정하였습니다.
이후 오나라의 모든 대신들은 더 이상의 출병을 반대하였으나 제갈각은 천하통일의 야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공동집권자인 등윤을 설득하여 내정을 맡기고 총동원령을 발동하여 20만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먼저 신성을 압박하여 파견 오는 위나라 구원병과 일전을 치러 대승을 거두자는 전략이었으나 사마사는 신속한 결전을 주장하는 관구검, 문흠 등에게 수비 전을 명하면서 신성의 방어력을 믿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제갈각의 오 군이 몇 달간 집중 공격하여도 신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더위에 물을 갈아먹은 오 군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다 보니 설사와 종기가 퍼져 병자가 과반수나 되고 전염병이 돌아 사상자가 들판을 뒤덮었습니다. 제갈각은 토산을 쌓아 투석기와 쇠노로 공격하자 성주인 장특이 장군의 인수를 던지며 말했습니다.
“위나라 법은 공격받은 지 100일이 지나도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하여도 가족들에게 연좌시키지 않소. 이미 90일이 지났으니 며칠만 지나면 가족들을 염려하지 않고 항복하겠소.”
오 군이 공격을 멈추자 장특은 급히 성을 수리하고 방어벽을 강화한 다음 소리쳤습니다. “성은 다 보강되었다. 공격할 테면 공격해 봐라!”
화가 난 제갈각이 총공격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 군의 관리들이 병자가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하자 제갈각은 보고자를 참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제갈각에게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는 자가 사라졌습니다. 도위 채림도 몇 차례 간언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위나라로 도주하였습니다. 기다리던 사마사는 오 군을 기습하였습니다. 제갈각은 오나라의 전군이 위기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퇴각하였습니다.
제갈각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픈 병사들이 회복되면 다시 북진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건업에 도착하여 측근들로 조정을 다시 채우고 불만세력을 억압한 다음 자신의 친위 세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 무위장군 손준은 제갈각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초기에 손홍의 음모를 알려주었으나 자신은 권력에서 소외되었습니다. 합비 신성싸움의 패전으로 제갈각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손준은 제갈각을 타도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손준은 어린 황제 손량을 설득하여 외정에서 돌아온 제갈각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궁중으로 연회를 열어 제갈각을 초청하였습니다. 제갈각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갈각은 연회 도중 손준의 칼에 쓰러졌고 오나라의 제갈 가문도 모조리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훗날 장군 손준의 사촌동생 손침을 제거한 황제 손휴에 의하여 제갈각은 복권되었고 촉의 제갈량의 양자로 입양되었던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에 의하여 제갈 가문의 후사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