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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ug 17. 2023

<제27화> 관우와 방덕의 대을 이은 악연


삼국지에서 관우의 위상은 독보적입니다. 살아생전에는 촉의 대장군으로 익주를 다스리던 유비의 가장 믿음직한 존재로 독립적으로 형주를 다스리는 지배자였고 젊어서는 조조의 유혹을 뿌리친 의리의 화신으로 죽음 앞에서도 손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열후에 봉해지고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만약 관우가 그대로 눌러앉아 조조를 섬겼다면 고관대작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우는 보장된 출세를 버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유비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관우가 손권에게 항복했다면 오늘날의 관우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우가 현재 중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살아생전 소금장수에서 시작하여 오직 유비에게만 충성을 바친 의협의 대명사로서의 처신과 더불어 촉한이 멸망한 후의 관우 후손들에게 닥친 비극적 결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무당들은 억울하게 죽은 위인들을 영험한 존재라고 믿어 신으로 모시고 복을 빌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영 장군과 남이 장군이 특히 영험한 신으로 무속신앙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었다고 합니다.     


위서 방덕전에 기록된 자료에는 방덕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방덕의 어린 시절과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뒷부분에 방덕이 관우에게 살해되자 조조가 매우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방덕의 두 아들을 열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비는 왕위에 오른 후 방덕에게 시호를 내렸고 방덕의 아들 방회 등 네 명에게 관내후 작위를 주고. 식읍 1백 호씩 주었다고 추기되었음에 반하여 우금 전에는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만이 절개를 굽히지 않고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는 오랫동안 애통해하다가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우금을 안 지 30년이 되었는데, 어찌 위험에 처하고 어려움에 임하여 오히려 방덕만도 못할 것을 생각했단 말인가!” 

손권이 관우를 붙잡으며 우금이 오나라에 있게 되었고 조비가 즉위하자 손권이 우금을 돌려보내자 조비는 우금을 만나서 오나라에 사자로 가야 하니 먼저 조조의 무덤인 고릉에 참배하라고 보낸 다음 조조의 능이 딸린 곳에 우금이 항복하고 방덕이 저항하던 상황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우금이 그것을 보고 한탄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방덕이 남안군 훤도현 사람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는 삼국이 통일되어 삼국지를 기록할 시점의 지명이고 방덕이 태어날 때에는 량주 천수군 출신의 변방 사람이었습니다. 마등의 부하였던 방덕은  이민족인 강족과 저족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승진한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마등이 조조에게 복종할 때 조조는 종요를 보내 관중의 장수들을 지휘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조조군이 원소의 아들 원담 군과 싸우게 되었는데 방덕은 선봉에 서서 원담의 부하 장수인 곽원의 목을 베었습니다. 곽원은 지휘관인 종요의 조카였으므로 종요가 통곡하였고 방덕이 사죄하자 종요는 “곽원은 나의 조카지만 나라의 적인데 그대가 무엇을 사과하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훗날 방덕의 아들 방회는 종요가 75세에 낳은 늦둥이 종회의 부하로 종군하여 촉을 멸망시키고 관우의 일족을 멸족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방덕은 마등의 군대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는데, 마등이 조조가 다스리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궁궐을 지키는 위위로 임명되어 수도로 가자 방덕은 서량에 남아서 마등의 아들 마초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조조가 마등을 죽이고 마초를 공격하자 방덕은 마초를 따랐고 마초는 한중의 장로를 따랐습니다. 마초가 유비에게로 가면서 방덕을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방덕은 조조에게 투항하였습니다. 방덕의 주군이었던 마등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하였으며 사촌 형 방유도 한중에서 유비를 섬겼으므로 주변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방덕을 믿지 않았습니다. 방덕은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므로 뜻을 세워 나라를 위해 죽겠소. 나는 몸소 병사를 이끌고 관우를 공격할 것이오. 올해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오.”      

마초의 처음 주군이었던 마등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주군의 아들이었던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하였습니다. 단지 마초가 잠시 섬겼던 한중의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하였을 뿐입니다. 사촌형 방유도 유비를 섬기고 있는데 갑자기 방덕은 자신을 받아주고 알아주었던 조조에게 올인한 것은 방덕이 충성심을 바칠 대상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비와 손권 연합군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이긴 후 서로 동맹이면서도 경쟁하는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조조와 한중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이어가자 유비는 손권이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형주를 손권과 분할하였습니다.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여 강하 계양의 동쪽은 손권이 차지하고 남군과 영릉 무릉의 서쪽은 유비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남양과 남군의 양양은 계속 조조의 지역으로 남았습니다. 관우는 손권과의 이런 협상에 불만이 많았고 조조를 공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보충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는 양번 전쟁을 일으켰고 위기를 느낀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파견하였습니다. 우금은 조조가 일찍이 “아무리 역사적인 명장이라도 반드시 그를 능가한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극찬한 장수였지만 새로 항복한 방덕은 마초의 부하였으므로 방덕의 용맹성과는 달리 당연히 그의 충성심은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방덕은 모든 장수들이 두려워하는 관우와 교전을 벌이다가 화살 한 방을 관우의 이마에 명중시키기도 하였고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지 않았던 여포, 태사자에 비견되는 명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관우 군에서는 방덕을 ‘백마장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관우 진영에서는 방덕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219년 8월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천재지변을 활용한 관우에 의하여 우금의 지휘하에 있던 7군은 모두 익사하였고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금과 방덕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금은 항복했지만 관우가 진심으로 항복을 권유하여도 방덕은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방덕은 관우에게

“너 이 모자라는 놈아. 어디서 감히 항복을 말하는 게냐? 위왕은 강력한 백만 병사를 거느리고 위력이 천하를 떨치고 가는 곳마다 당할 자가 없다! 너희 유비라는 인간은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인가?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어디 우리 위왕의 상대가 되겠느냐! 나 방덕은 조정의 귀신이 되기를 원하지 도둑의 장군은 절대로 안 할 것이다!”     


방덕이 촉에 항복하였다면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던 것처럼 우대를 받았을 것이지만 위나라의 그의 후손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방덕이 죽고 아들들이 제후에 봉해진 현실과는 정반대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위나라와 촉의 국력의 차이는 현격하였고 장기적으로 위나라가 천하 통일할 가능성은 촉이 통일할 가능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방덕은 후손들을 위하여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새삼스럽게 이전의 마등과 장로에게는 생기지도 않았던 의리와 충성심이 갑자기 조조에게 생겼다기보다는 자신의 후손들을 위하여 너무나도 당연한 위나라의 전략적 우위를 인정하는 선택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방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처음 싸움터에 나올 때부터 방덕은 이상할이만큼 관운장과의 경쟁의식에 들떠 있었다. 스스로를 관운장과 같은 높이로 끌어올려놓고 시작한 그 싸움에서 한껏 부풀어난 자존심은 여지없이 지고 난 다음에도 끝내 스스로를 낮추려들지 않았다.

 혹에 항복해도 용서받을 만한 큰 핑계가 둘씩이나 있었건만 오히려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은, 아무래도 이제 겨우 이태 남짓한 조조의 후대에 대한 보답으로는 지나쳤던 듯싶다.”      


방덕의 아들 방회는 263년 사마소가 종회와 등애를 보내 촉을 정벌할 때 종회의 부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종회의 명령으로 전속, 호열과 함께 강유를 추격하였고 촉한의 후주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자 아버지 방덕의 복수를 위하여 촉한을 샅샅이 뒤져 관우의 아들 관흥의 서자인 관이를 비롯한 관우의 후손들을 모두 찾아내 멸족시켰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방회가 관우의 후손을 모두 죽인 기록은 삼국지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고 배송지 주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소설 삼국지에는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관우의 셋째 아들로 관색이 잠깐 등장하지만 이는 소설 속의 허구의 인물인 뿐입니다. 실제 인물인 방회는 용맹함이 방덕에 버금갔고 중위장군까지 승진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기록상 관우의 가장 오래된 사당은 6세기의 남조 양나라와 진나라 시절 호북성 경덕선사에 세워진 관우묘이며 국가에서 관우를 추앙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시절부터라고 합니다. 관우에게 공, 왕, 제군, 대제 등 작위가 주어진 것은 북송시대부터이고 명나라 시절에는 황제로 승격되었고 청나라 시절에는 관성대제 앞에 좋은 뜻을 가진 한자를 가득 붙여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로도 칭송되었습니다.  

    

촉서 ’관우전‘의 기록을 보면 관우도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될 정도의 가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에는 관우가 왜 고향인 해현에서 쫓겨났는지 기록이 없지만 악덕 소금 장수를 죽였다는 설, 소금 상인 경호원이었다는 설 등이 존재합니다. 의협심 많은 관우가 토호에게 시달리는 젊은 여성을 구하려 토호를 죽이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사료적 가치가 부족하고 윤색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손권은 관우를 사로잡자 그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게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렸습니다. 

 “이리와 같은 자는 키울 수가 없는 법입니다. 후에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공도 저 사람을 즉시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환난을 얻었고 마침내 천도를 논의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손권은 반장과 마충에게 관우를 처형하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유비의 후환이 두려워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손권의 술수에 걸려들지 않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 주었습니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관운장을 존숭해 떠받들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초부터인데, 관우의 이름을 함부로 쓰고 부를 수 없다고 해 패관기서에는 모두 관모라고 일컬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관운장을 성인으로 취급해 공문서라든지 장부 상에 관성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학문적 스승으로 높여서 관부자라고까지 일컫기에 이르렀다. 이런 오류와 비루함이 그대로 답습되어 천하의 사대부들은 관운장을 정말 학문하는 학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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