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는 협객의 기질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소금장사를 하다가 토호를 죽이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관우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계산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관우의 선택 기준은 간단했습니다. 유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면 하는 것이고, 해가 되는 일이면 죽인다 해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관우와 같은 인물은 아주 드문 경우였습니다. 관우에게 항복한 우금과 우금의 부하들처럼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방덕은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관우 부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우처럼 유비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인물들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우금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손권은 오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약속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정치인이었고 또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조는 손권이 관우의 후방을 치겠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손권이 부탁한 대로 편지 내용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오랜 신하 동소가 말했습니다.
“군사 일은 항상 권도로써 하는 법이고 시기와 상황에 적절해야 합니다. 손권이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에 따르는 척하면서 내부적으로 그 비밀을 누설하여야 합니다.”
손권의 편지를 누설하면 관우는 철수할 것이고 자연히 조인이 지키는 번성의 포위는 풀리며 위나라는 이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촉의 관우는 배신한 손권에게 치를 떨면서 서로 싸우게 되고 싸움이 길어지면 위나라는 앉아서 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와 촉이 지치면 형주 전체를 도모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비밀을 지킨다면 손권만 유리해지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권이 형주 전체를 차지하면 위나라는 번성의 포위만 풀리는 이점 이외에는 이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번성에서 버티는 장수와 병사들이 구원병을 기다리다 지쳐 만약에 딴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위나라는 큰 손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관우가 번성에서 물러나도록 조치하는 것이 위나라에 이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조는 즉시 양릉피에 주둔하고 있는 서황에게 손권의 편지 사본을 포위된 번성을 향하여 쇠뇌고 쏘아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통신용으로 사용하는 대형 쇠뇌는 4~5리가 날아가지만 매우 부정확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조조는 일부러 여러 번 쇠뇌를 발사하게 하였고 사본의 일부는 조인이 있는 번성에 떨어졌지만 일부는 관우의 군중에도 떨어졌습니다. 번성에서는 위군의 사기가 올라갔고 반대로 관우의 군대는 앞과 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면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관우는 고민하였습니다. 함락 직전의 번성에서 철수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남군과 공안을 지키는 미방과 부사인이 버텨준다면 번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갈 생각도 있었습니다.
219년 10월 손권은 남군을 공격하면서 손교와 여몽을 각각 좌우부 대독에 임명하였습니다. 의심 많은 손권에게는 당연한 방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몽이 손권에게 단도직입으로 말하였습니다.
“만약 지존께서 보시기에 정로장군 손교가 능력이 있다면 마땅히 손교를 임명하시고 저 여몽이 능력이 있다면 여몽을 임명하셔야 합니다. 지난날 적벽대전 시 주유와 정보를 각기 좌우부 대독으로 임명하여 서로 화목하지 않아 국사를 망칠 뻔하였습니다.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바로 여몽에게 사과하고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몽을 대독으로 삼고 손교는 후방에서 여몽에게 지원하라.”
손교는 손권의 작은아버지 손정의 아들로 손권의 사촌동생이었습니다. 손교는 성격이 강하여 오나라의 맹장 감녕과도 크게 충돌하였고 감녕을 굴복시키려 하였던 장수였습니다. 여몽은 이를 염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여몽은 매우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여몽의 수군은 정병들을 배의 선실이나 내부에 매복시키고 선상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만 나오게 하여 상선으로 위장하였습니다. 관우가 강하 군의 접경부터 강변을 따라 세워놓은 봉화대를 접수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여몽은 관우가 설치한 망대나 척후병을 보면 흥정이라도 하려는 듯 접근하여 모두 붙잡아 포승줄로 묶었습니다. 여몽의 선봉부대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것을 번성에서 싸우는 관우는 물론 후방의 미방과 부사인도 깜깜하게 몰랐습니다.
남군태수 미방은 강릉에 주둔하였고, 장군 부사인은 공안에 있었습니다. 미방은 유비의 부인인 미부인의 친동생이었고 미축과 함께 유비의 오랜 측근이었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미방과 부사인을 경시하였습니다. 관우가 보기에 눈에 차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늘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번성 토벌전이 장기화되자 물자보급이 여의치 않았는데 관우는 늘 이를 책망하였습니다. 관우가 “돌아가면 내 마땅히 이 두 놈을 치죄하리라.”는 말이 전해졌으므로 미방과 부사인은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여몽이 먼저 공안을 기습하자 부사인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습니다. 여몽은 이 기세로 강릉까지 진격하였고 강릉을 포위한 다음 부사인을 성안으로 보내 미방을 설득하게 하였습니다. 미방 역시 저항하지 않고 여몽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여몽조차도 이렇게 쉽게 공안과 강릉이 함락될 것을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여몽은 강릉에 입성한 다음 민심을 얻기 위하여 노약자를 위로하고 죄수를 석방하였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엄금하였습니다. 여몽과 같은 고향의 한 병사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민간의 삿갓을 하나 빼앗아 투구 위에 얹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지자 여몽이 그 병사를 잘아들였습니다. 병사는 변명했습니다.
“저는 갑옷이 나라에서 지급한 공물이었으므로 이를 보호하고자 민가에서 잠깐 삿갓을 빌렸을 뿐입니다.”
여몽은 눈물을 흘리며 병사를 참수하였습니다. 강릉의 민심은 여몽에게로 기울어졌습니다.
조조가 번성에서 포위당한 조인을 위하여 직접 나서겠다고 하자 환계가 말했습니다.
“지금 조인 등은 겹겹이 포위된 가운데에 처해 있지만 죽음으로써 수비하며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로 대왕께서는 멀리 있으면서 위세를 보이십시오. 안에서는 죽을 각오로 싸울 마음을 품고 밖에는 강한 구원병이 있으며 대왕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힘을 보이시고 있는데 어찌 직접 가고자 하십니까?”
조조는 환계의 말을 옳게 여기고 자기 직속 병력과 은서 주개 등 여러 장수가 지휘하는 12개 진영의 부대를 연이어 서황의 군에 합류시켰습니다. 손권이 강릉과 공안을 성공적으로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황은 언성을 함락시킨 다음 사총을 공격하였습니다. 관우와 서황의 군대가 벌판에서 대치하였습니다. 서황은 관우보다 1~2살 연장자였고 과거 조조에게 투항했을 때 서로의 고향이 같은 하동이었으므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잠시 안부 인사를 나눈 다음 서황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관운장의 목을 베어 오면 상으로 황금 1000근을 주겠다.”
돌변한 서황의 태도에 관우가 놀라 항의하였습니다.
“대형,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서황이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일일 뿐이오.”
관우 군은 대패하였고 패잔병을 수습하여 양양성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양양에 이르러서야 강릉과 공안을 손권이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번성의 포위가 풀리고 나자 조인은 관우를 추격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엄이 말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비록 관우가 이미 패해 외로운 군사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지만 다시 병사를 수습해 손권에게 보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즉시 태도를 바꾸어 관우와 손을 잡고 우리에게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장차 우리에게 환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내버려 두어 저들끼리 다투게 하는 것이 났습니다.”
위나라 군사에게 쫓기던 관우가 남군으로 후퇴하면서 여몽이 점령한 강릉으로 사자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하였습니다. 여몽은 관우가 보낸 사자를 두텁게 대우하였고 마음껏 돌아다니게 하였습니다. 강릉에 있는 가족들의 근황은 관우의 병사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 군의 탈주병은 늘어갔습니다. 관우는 독군 조루의 건의를 듣고 맥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인근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맹달은 자기애가 강하여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맹달의 입장에서는 충성과 의리보다는 현세에서의 영달과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었고 지원을 고민하던 유봉도 맹달의 설득에 넘어가 모른 채 하기로 하였습니다. 11월 찬바람은 불기 시작하는데 병사들은 몰골이 초라한 수백 명의 패잔병들만 남았습니다. 손권은 주연과 반장을 보내 관우의 퇴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주연과 반장은 임저현에 도착하여 협석에 주둔하면서 부하인 마충에게 매복을 명하였습니다. 장향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성을 나선 관우의 뒤에는 관평과 도독 조루와 십여 명의 기병만이 따라붙었습니다. 장향 골짜기에 들어서자 매복한 마충과 수백 명의 오 군들이 갈고리와 그물을 던졌습니다. 갈고리에 걸려 말이 꼬꾸라지자 관우는 말에서 나동그라졌습니다. 관우는 더 이상 저항할 힘과 의지도 없었습니다.
손권이 관우 부자를 죽이고 형주를 완전히 평정한 것은 219년 겨울 12월의 일이었습니다. 관우는 항복하고 살아남기보다는 의리를 선택하였고 죽어서 공자를 뛰어넘는 수호신과 같은 대접을 받는 5천 년 중국사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