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 회장의 자서전 '축구의 시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2003년 3월 9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중계된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참다 참다 내뱉은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찰의 민낯을 마주할수록, 노 전 대통령의 이 말은 명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2024년 8월 7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행보를 보면 노 전 대통령의 이 명언이 뇌리를 스친다. “정몽규 회장님,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지금 2024년 파리 올림픽이 한창이다. 그러나 무려 40년 만에 한국 축구가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많은 축구팬들은 예년과 달리 올림픽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조용히 지나가도 모자랄 판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일까. 그는 최근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축구의 시대』를 들고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나타난 것이다. 몇몇 언론들은 FIFA에서 제공한 사진을 두고 정몽규 회장이 인판티노 회장에게 자신의 자서전을 선물하면서 ‘같이 읽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사진들을 아무리 봐도 그 책은 한글판이었다. 또한 FIFA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된 정몽규 회장의 영문 인터뷰를 고려할 때, 과연 정몽규 회장이 자신의 자서전 내용을 영어로 잘 설명했을지 의문스럽다. (해당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inside.fifa.com/about-fifa/president/news/korea-republic-and-fifa-align-in-using-football-as-a-social-tool)
지금 많은 축구팬들은 물론 대다수의 언론도 이번 정몽규 회장의 파리행을 두고 비판일색이다. 그 이유는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서 그간 그가 보여준 무능력하고, 불공정하고, 옹졸한 행보 때문이다. 동시에 너무도 아마추어 같은 축구협회와 회장과 달리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면면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기 때문에 축구 팬들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다.
세계 최고로 꼽히는 영국 EPL 득점왕 출신의 손흥민과 동일리그에 뛰며 최근 유럽에서 핫한 전술가형 감독인 데 제르비(마르세유)의 러브콜을 받은 황희찬을 보유한 공격진.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유형의 미드필더로 파리 생제르맹의 이강인, 분데스리가 올해의 미드필더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힌 마인츠의 이재성, EPL 2부 리그지만 이적 첫해부터 스토크 시티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배준호 등을 보유한 미드필더진. 비록 다른 포지션에 비해 약점으로 뽑히지만,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와 함께 세계 최고의 팀으로 불리는 바이에른 뮌헨의 주전 수비수 김민재, 올해 EPL 브랜드포드 소속으로 프리시즌에서 주전으로 기용되며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김지수를 보유한 수비진. 그리고 선방 능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코리안 데 헤아로 불리는 조현우와 단순히 선방뿐만 아니라 독일의 노이어와 같이 준수한 발밑 기술을 요구하는 현대 축구 트렌드에 적합한 김승규를 보유한 골키퍼진. 정말 축구협회와 코치진만 좋으면 그 어느 때보다 기대되는 라인업이다.
그러나 이런 역대급 선수진을 보유하고도 최근 대한축구협회와 정몽규 회장이 보인 무능력은 축구팬으로서 너무 화가 날 정도다. 실제 대한축구협회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조차 대한축구협회 행정에 대해 지난주 예비 감사를 마쳤고, 올림픽이 끝나고 본 감사를 계획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최근 한국 축구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인가? 몇몇 굵직한 사건들만 한 번 상기해 보자. 단연 최근 축구대표팀 감독 선임과정에서 축구협회는 무능력 종합선물세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홍명보 전 울산 HD 감독이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이어 다시 한번 대표팀 감독으로 ‘면접도 없이’ 사실상 특채로 선택되었다. 채용 공지는 공채였으나 축구협회는 홍명보 전 축구협회 전무를 특별채용한 것이다. 심지어 홍명보 전 울산 감독은 대표팀 감독으로 발표되기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공식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대표팀 감독으로 거론되는 게 불편하다’며, 울산팬들을 향해 ‘걱정 마라’고 공언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주일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며 울산팬들을 버릴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홍명보 감독은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는 대표팀 감독을 수락하는 동시에 ‘나를 버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들이다. 추정 연봉 20억이 넘는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무슨 자신을 버린단 말인가. 그냥 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오히려 버림을 받은 K리그와 울산 현대 팬들에게 사죄를 할 것이지. 이는 철저하게 ‘나 아니면 한국축구를 살릴 수 없다’는 허황된 영웅주의에 빠진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문제인 것은 지난 6개월 동안 대표팀 감독 선정과정에서 축구협회가 보인 무능이다. 축구협회는 대표팀 감독 선임을 위한 전력강화위원회를 꾸렸는데, 그 위원회는 회의 중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에 회의 내용을 발설하며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특정 감독 후보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쓸데없는 표현을 일삼으며 협상의 ABC 조차 지키지 못했다. 결국,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제시 마시(현 캐나다 감독) 후보를 놓쳤다.
<사진-4> 이번 감독 선임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제시 마시 감독은 우리 대표팀과 협상이 결렬되고 캐나다 감독을 맡아 불과 1달여 만에 참가한 2024 코파 아메리카에서 4위를 기록하며 결과는 물론 경기 과정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출처: OSEN)
<사진-5> 포르투갈 스포르팅의 루벤 아모림 감독은 현재 유럽에서 매우 ‘핫’한 감독이다. 위르겐 클롭 감독이 이번시즌을 마치고 떠나는 리버풀의 유력한 차기 사령탑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출처: 스포츠서울)
이후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주호 위원(전 도르트문트 선수)이 자신의 유투브 방송에서 그간의 문제점들을 상세히 밝혔다. 여러 내용이 있었으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그 위원회에 참여했던 소위 전문가들이 박주호 전 선수가 추천했던 ‘아모림’ 감독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모림 감독은 현재 포르투갈 리그의 스포르팅 감독을 하며 유럽 내에서 가장 뜨거운 감독 중 한 명이다. 축구 전문가라면 모를 수 없는 감독이다. 실제 아모림 감독은 EPL 리버풀 구단의 클롭 감독의 후임으로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다. 어떻게 대표팀 감독 명단을 선정하는 전력강화위원회에 있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박주호 위원이 말한 아모림 감독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자질도 없는 나이 많은 위원들은 박주호 전 선수가 어리고 지도자 경험이 없다며, 면전에서 그를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쌍팔년도식 사고인가. 그리고 그런 위원들로 전력강화위원회를 구성한 축구협회와 협회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또한, 대표팀 감독을 선임하는 지난 6개월 동안 축구협회는 두 차례 임시감독을 선임했다. 그 임시감독이 황선홍 감독과 김도훈 감독이었는데, 당시 황선홍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황선홍 감독이 A대표팀을 겸직하는 안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럼에도 축구협회는 비용 때문이었는지 황선홍 감독에게 겸직을 맡겼다. 이로 인해 황선홍 감독은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마지막 사우디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는 촌극이 발생했다. 그리고 한국 축구대표팀은 무려 40년 만에 올림픽 진출이 좌절되었다. 현재 축구협회에서 그 누구도 이 사안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
이 외에도 클린스만 감독 선임 과정 문제, 클린스만호의 아시안컵 실패 과정 그리고 지난해 승부조작 기습 사면 시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마추어 행정은 너무 많다. 이에 정몽규 회장은 자서전 『축구의 시대』를 발간할 것이 아니라 『무능의 연속』을 발간해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최근 이 같은 일련의 축구협회 사태에 대해 100% 정몽규 회장의 잘못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가장 큰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정몽규 회장은 사과하기는커녕 4선 연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번에 자서전을 출간한 것도, 그 한글판 자서전을 들고 파리까지 날아가 인판티노 회장에게 전달한 것도 모두 그 일환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활용되는 글로벌 채용 플랫폼인 링크드인(LinkedIn)에 정몽규 회장의 소개글을 보면 그의 소위 스펙은 화려하다. ‘서면상으로’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1962년 출생
- 한국의 HDC(현대산업개발)의 회장
- 53대 대한민국축구협회 회장
- 198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졸업
- 1988년 옥스퍼드대학교 정치학, 철학, 경제학(PPE) 석사 졸업
특히, 그가 졸업한 옥스퍼드대학의 PPE 과정은 하나의 융합과정으로 영국의 정계는 물론 언론계 엘리트 집단을 주름잡고 있는 학과다. 지난 7월 영국의 신임 총리로 선출된 키어 스타머 이전의 두 총리였던 리즈 트러스와 리시 수낵 모두 이 PPE 과정 졸업생이다. 물론 리즈 트러스는 50일도 채 총리직에 있지 못했고, 리시 수낵은 지난 총선에서 역사상 영국 보수당에 가장 큰 참패를 안긴 인물이기에 어떻게 보면 이 세 인물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정몽규 회장의 링크드인 친구는 2024년 8월 기준 무려 ‘5명’이다.
그렇다면, 서면상으로는 위대한 그가 실제 리더로서 가장 결여된 능력은 무엇인가? 첫째, 비겁한 리더다. 그는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서 여론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선수들을 제쳐두고 자신이 중심에 선다. 그러나 축구협회의 잘못된 행정으로 인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서는 뒤로 숨어버린다. 도통 나오질 않는다. 그런 그를 보면 마치 1950년 북진통일을 그렇게 외쳐대며 젊은 청년들은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은 한강철교를 불태우고 도망갔던 이승만이 떠오른다.
<사진-8> 지난 2024년 아시안컵에서 졸전을 거듭하고 여러 문제를 야기한 채 대표팀이 귀국한 인천공항에서 정몽규 회장은 찾을 수 없었다. 클린스만과 선수들만 그 비난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출처: OSEN)
위 두 사진에서 정몽규 회장은 전혀 상반된 행보를 보여준다.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벤투호는 16강에 성공한다. 당시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보다도 당시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은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공을 소유하는 공격적인 축구를 보여주었다. 이에 많은 축구팬들은 공항에서 벤투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자 정몽규 회장은 그 자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그 중간에 선다. 반면, 지난 2024년 아시안컵에서 단연 제1의 우승후보로 꼽히던 한국은 졸전에 졸전을 거듭하다 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그 입국장에서 정몽규 회장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꽂은 클린스만이 실패하자, 언론을 피해 따로 입국한 것이다. 이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 리더의 행태인가.
둘째,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리더다. 이번에 그가 출간한 자서전의 몇몇 대목을 보면 마치 윤석열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족함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외부에서 찾는다. 쉽게 말해, 나는 잘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무식하고, 언론이 잘못 전달해 문제가 비롯된다는 태도다. 이번 자서전에 포함된 두 가지 대목을 살펴보자.
(1) "축구협회장에게 필요한 덕목은 높은 수준의 역량과 도덕성, 인내심, 참을성이다.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등 주요 대회에서 대표팀이 부진하면 온 국민의 원성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어느 종목도 국가대표팀 성적이 나쁘다고 회장 퇴진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럴 때마다 축구협회장이나 국가대표팀 감독은 '국민욕받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 "누군가 내 임기 도중 이뤄냈던 업적에 대해 점수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10점 만점에 8점 정도는 된다고 대답하고 싶다. ··· 나는 점수에 상당히 박한 편이라 내가 8점이라고 하면 상당히 높은 점수다."
첫 번째 대목에서 정몽규 회장은 지금 자신이 왜 국민들은 물론 축구팬들에게 비판을 받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다. 오히려 그 탓을 비난하는 국민들과 팬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목은 더 가관이다. 지금 자신의 지난 10년의 행정을 두고 어떻게 저렇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가. 이는 확실히 메타인지, 즉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하다는 증거다. 이런 리더가 가장 무서운 리더다. 왜냐하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현재 자신의 조직의 문제점을 무조건 외부에서 찾기 때문에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리더 교체가 필요하다. 몇몇 축구팬들이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양궁협회장 정의선 회장에게 축구협회장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지만, 이제는 재벌총수가 아닌 전문경영인(CEO)에게 축구협회를 맡겨야 할 때다. 이제는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구협회의 경영을 할 수 있는 전문 경영인과 그 아래 인맥이 아닌 축구의 관점에서 한국 축구의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특히 현재 세계 축구의 트렌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이 포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