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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Apr 11. 2024

엄마 이제 축구핑이야?

百聞不如一見


올해 2월에 걸린 감기가 낫지를 않아 검사를 하니 폐렴이라고 했다. 폐렴 진단 전부터 이 병원 저 병원에서 받아먹은 항생제까지 치면 한 달을 넘게 항생제를 먹었는데, 어느 날 양 쪽 다리에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붉은 점이 곡히 올라왔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혈액염 증상이란다.


이제 만으로 마흔 살. 출산 후부터 어깨며 허리, 뒤꿈치까지 온몸 여기저기가 아픈 것은 만성질환이 되어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폐렴에 걸리거나 혈액염 증상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작년 한 해, 여러 일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불규칙한 생활에 수면 부족, 심리적 스트레스 그 모든 것이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나 싶었다. 한 때 우울감이 심할 때는 차라리 어디라도 아파서 그냥 죽고 싶다고도 생각했는데 막상 건강에 위협을 느끼니 아이들이 제일 눈에 밟혔다.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다섯 살 꼬맹이를 재우며 한참을 울었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작았다. 아직도 너무나 작았다.


증상이 나타난 지 5일 만에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고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불안한 마음으로 주말에 아이들과 공원에 가서 노는데 딸아이가 캐치볼과 축구를 하자고 한다. 오랜만아이와 '놀아주지' 않고 '같이' 놀았다. 한참 했더니 온몸에 땀이 났는데 운동으로 땀을 흘린 게 얼마만인지 모를 정도였으나 땀난 것이 찝찝하지 않고 아주 후련했다. 몸속의 무언가 나쁜 것이 빠져나오는 듯 한 느낌, 잠시 아무 걱정 없이 무언가에 몰입한 느낌이 참 좋았다.


집에 돌아오며 축구가 너무 재밌었다는 딸아이에게 축구 배우고 싶으면 배워보라고 했더니 축구는 손흥민이나 이강인처럼 남자애들이 한다고, 자기 혼자 남자 친구들 사이에 껴서 하기는 쑥스럽다고 했다. 여자도 당연히 축구할 수 있고 여자 축구 선수 중에 지소연이라고 엄청 멋있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줬지만 딸은 축구하는 여자 친구는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축구를 배워야겠다고. 딸에게 여자도 축구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줘야겠다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가장 먼저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머리 길이었다. 길면 여자, 짧으면 남자. 아무리 여자도 짧은 머리일 수 있고, 머리 긴 남자도 있다고 말해주며 여러 사진을 찾아 보여주기도 했지만, 막상 자신의 눈앞에 그런 사람이 자주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고정관념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요새 둘째도 매일 머리 길이로 성별을 구별하여 남자인지 여자 인지 묻는 중이다.


그러니 축구하는 여자도 많다고 말하는 것은 딸에게 아무 영향도 없을 터였다. 결국 엄마인 나라도 축구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다음날부터 지역의 여자 축구 동호회를 검색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팀이 있었다.

여자 축구를 다룬 예능이 화제가 되면서 더 많은 동호회가 생긴 듯했다. I 중에 I인 내가 내 발로 축구팀에 연락해 낯선 사람들뿐인 동호회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공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공놀이를 좋아해 열 살 무렵부터 오빠를 따라다니며 야구도 하고 농구도 했다. 특히 공을 주고받는 걸 좋아했는데 상대해 줄 오빠가 없으면 건물 벽에 공을 던지고 받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운동장을 가득 메운 채 농구나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공놀이를 할 엄두가 안 났고 으레 그런 운동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체육대회 때 발야구나 피구를 하는 것이 여학생들이 그나마 즐기는 공놀이 문화였다.


성인이 된 후 부모님과 볼링장이나 당구장을 드나들며 공사랑을 이어가다 이십 대 후반에는 프로야구에 푹 빠져 퇴근 후 매일 야구중계를 틀어놓고 지냈고 주말엔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직관을 다니곤 했으니 사실, 딸을 위해서라는 말 뒤에 '내가 하고 싶은' 마음도 제법 컸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꽤나 심한 내향인으로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결정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폐렴이나 혈액염 같은 증상이 없었더라면 실행에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고 이왕이면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괜한 쑥스러움에 "나 과연 잘할 수 있을까~"로 시작하는 티니핑의 노래 한 구절을 따라 했다. 둘째 딸아이가 푹 빠져있는 티니핑은 온갖 '핑'들이 나오는데 특징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캐릭터들이다. 사랑의 하츄핑, 친절의 조아핑, 웃음의 방글핑 등등 100가지도 넘는다. 둘째는 그 모든 핑을 다 외울 정도로 빠져있어서 종종 남편에게는 방구핑이나 무좀핑, 나에게는 청소핑이나 깔끔핑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언니에게 "이번 주부터 엄마 축구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는 걸 듣더니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며 묻는다.

"엄마 이제 축구핑이야?"

다 같이 웃는 와중에 남편이 "아빠는 커핑, 엄마는 싸커핑, 엄마랑 아빠는 커핑 커플"이라며 안 웃긴 아재 개그를 하자 둘째가 진지하게 아빠는 "방구핑"이라고 정정해 주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딸아이가 앞으로 축구를 배우든 안배우든 한 번 말을 내뱉었으니 일단 시작은 하고 봐야겠다.

마흔 살에 축구핑이 된 나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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