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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May 21. 2024

[문장]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

나는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렸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줌으로 하는 페페연구소 독서모임 페북살롱의 5월 도서는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이었다. 육퇴 후 식탁에서 책을 읽다 보니 신간 책을 부엌 식탁 뒤에 쌓아두곤 하는데 어느 날 딸아이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며 "엄마, 이게 무슨 책이야?"라고 물어서 간략히 설명은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러다 또 며칠이 지나 식탁에서 폭풍 잔소리를 들은 딸아이는 갑자기 뒤를 돌아 그 책을 매만졌는데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딸아이의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어느 밤도 있었다.


책을 읽으며 작년 여름에 말과 활 아카데미에서 들은 모녀서사 강의가 계속 떠올랐다.(당시에 읽었던 책들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고 겨우 과제물만 남긴 것을 후회했다)


기억을 더듬어 강의 내용을 떠올려 보면 어릴 적의 학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육체적 만성질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딸에게 애정을 요구할 때 자신의 죽음으로 협박하는 엄마의 행동은 곧 학대라는 것, 그런 엄마 때문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거짓 자아로 공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딸들이야기가 있었다.


딸과의 관계가 고민이 되어, 정확하게는 엄마라는 역할이 버겁게 느껴져 자꾸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신청했던 강의였는데 오히려 딸의 입장에서 엄마를 이해하고 싶어 강의를 듣는 젊은 학인들도 많았다. 나도 그제야 내가 딸과 맺는 관계의 양상들이 유년시절 엄마와의 관계에서 양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엄마에 대한 측은함과 고마움이 뒤엉켜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지내던 시절들이 있었고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딸아이에게 반복하는 내가 있었다. 그 강의를 들은 후로 1년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도 엄마-나-딸의 관계를 잘 정립하지 못했고 관계의 변화를 위해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주체화되기까지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은 영향을 주는 타자가 엄마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엄마의 언행이나 그에 전제되어 있는 엄마의 무의식은 아이를 얼마든지 조종하거나 괴롭힐 수 있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의 이름을 걸치고 있는 위험이다. 연약한 아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하나의 권력처럼 아이에게 작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아이는 엄마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엄마가 원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짧게는 청소년기, 길게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와 분리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딸은 자신이 엄마와 독립되어 있는 주체적인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해를 하거나 섭식장애를 갖게 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모성신화는 사실은 모성의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정에 충실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길러야 하는 '엄마'의 자리는 여성 스스로가 선택했다기보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모성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모성을 신성시하다가도 '헬리콥터 맘', '돼지엄마', '맘충'으로 금세 비난을 쏟아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엄마'라는 역할에 갇혀 살아온 여성들의 삶이 본인에게도 자녀에게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투영하여 딸의 삶을 주조하거나 딸과의 관계에 집착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딸들의 삶이 안타깝게 느껴진다.(사실 아들에게 집착하는 엄마의 경우도 많으나 아들은 엄마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가부장제 속에서 자란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일찍 분리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년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이 "엄마도 딸도 서로에게 상호독립적이어야 행복하다", "서로의 불행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넷은 엄마가 죽고 나서야 주체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녀 관계라면 저 말대로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쪽에서라도 작은 변화를 일으켜 부딪히고 상처 입는 과정을 겪어내야 또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엄마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따랐던 딸이 엄마의 사랑을 학대였다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겪어야 했을 혼란이 제넷의 글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섭식장애와 알코올 문제를 겪었던 제넷이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더 심한 방황을 하거나 타락의 길로 가지 않은 데에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성정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게 하고 그 과정에서 엄마와 자신의 관계를 더 돌아보고 자신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었다. 마지막에 제넷이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고 '내 정신건강과 행복'을 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고 책을 덮게 된 것에 한참을 안도하면서.




남기고 싶은 문장


p.171 가끔 엄마를 보면 미운 감정이 들었다. 그러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싫어졌다. 감사할 줄 모른다고 나 자신을 나무랐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엄마는 나의 전부였다. 나는 애초에 느끼지 말았어야 할 감정을 꾹 삼키며, “엄마, 정말 정말 사랑해요”라고 말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다. 아주 오랫동안 내 일을 위해, 또 엄마를 위해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p.305 내 인생의 목적은 엄마를 살리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이젠 허사가 되었다. 엄마에게 집중하며 보냈던 숱한 세월이,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해 줄 거라고 여겼던 일에 쏟았던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다 무의미해졌다. 이젠 엄마가 죽고 없으니까. 나 자신을 진정으로 알고 싶은 열망을 포기한 채, 나는 무엇이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무엇이 슬프게 하는지 등등 엄마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엄마가 곁에 없으니 이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무엇이 필요한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생일 소원으로 무엇을 빌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p.315 그나저나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내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내내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다. 나 자신을 찾는 데 써야 할 그 시기에 나는 늘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보냈다. 캐릭터(character, 인격)를 갈고닦아야 할 그 시기에 나는 온갖 캐릭터(등장인물)를 구축하면서 보냈다. 연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다. 연기는 내 정신적, 정서적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p.341 엄마가 나한테 가장 좋은 것을 원하지 않거나 나한테 가장 좋은 것을 행하지 않거나 나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정말로 몰랐다면, 내 삶과 내 관점과 내 평생의 정체성은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 삶과 내 관점과 내 평생의 정체성이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졌다면, 그 잘못된 토대에 맞서는 일은 그걸 무너뜨리고 새로운 토대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엄마의 바람과 요구와 승인에 따라 내 모든 움직임을 통제받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도 몰랐다.


p.401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너무 오랫동안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이젠 그 인생에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나는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렸으면 좋겠다. 섭식 장애나 캐스팅 감독이나 에이전트나 엄마의 속이 아니라 내 손에.


p.403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 확실하게 회복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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