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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Aug 21. 2023

아빠를 닮은 나를 닮아버린 딸

영혼의 모어를 갖게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 딸 스무 살 되면 엄마가 어떻게 한다고?”
“엄마 마음속에 있는 얘기 다 해준다고요.”


어림잡아 여섯 살쯤 엄마와 자주 나누던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자주 저 질문을 하고 자신이 정해준 답을 듣고 싶어 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은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예상과 달리 스무 살의 반토막쯤 밖에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엄마의 귀가 되었다. 시부모와 시누이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분노는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엄마의 화난 모습이나 분노에 찬 목소리는 무섭지 않았다. 정작 두려운 것은 그 분노 후 나를 바라보며 읊조리던 엄마의 말이었다.

“어쩜 네 아빠랑 똑 닮았냐.”



엄마의 분노가 결국 나에게 향할 것만 같은 두려움과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불안함에 시달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원망하다가 닮은꼴의 아빠마저 원망하기를 반복했다. 행여 엄마와 아빠가 다투어도 나가서 말리지도 못했던 것은 내 얼굴을 바라볼 엄마의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신 나는 알아서 청소도 설거지도 잘하는 철든 딸이 되었다.


중학생 때 엄마의 생일 전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시댁 일로 당신 생일에 집에 못 온다는 아빠와 전화로 다투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가 양푼에 미역을 넣고 불리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난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애꿎은 미역을 싱크대에 그대로 쏟아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내 마음 어딘가 한 구석에서 엄마에 대한 미움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쏟아져버린 미역을 대신해서.




엄마가 내 얼굴을 별 뜻 없이 쳐다만 보아도 불안한 나머지 자주 책상 앞에 앉아있기를 택했다. 내 얼굴 말고 좋은 성적표를 엄마 앞에 내밀고 싶었다. 게다가 여느 식상한 이야기처럼 아빠를 대신해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자식 뒷바라지에 헌신을 다했다는 엄마는 곧 우리 엄마이기도 했다. 내 안에 불어나던 미움 따위는 차마 쳐다볼 수도 없이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일찍 취업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여유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갈수록 더 좋아지는 성적표를 내밀었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엄마에게 성적표와 나의 얼굴은 상치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엄마는 줄기차게 성형수술을 권했다. “쌍꺼풀만 있으면 딱 예쁜데.” 중학생 때부터 들어오던 그 말은 가뜩이나 아빠를 닮아 싫었던 내 얼굴을 더 싫어하게 만들었다.


고집스럽게 수술 권유를 거절했다. 스스로도 싫어하는 얼굴이었으니 받아들일 만한 권유였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나는 수술 후 사람들의 관심을 끌거나 수술 사실을 밝혀야 하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렇게 해서 얼굴이 달라진다 해도 여전히 그 얼굴을 사랑하지 않을 것도 분명했다.


스물여덟이 되던 겨울, 쌍꺼풀 있는 낯선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었고 나를 보는 남성의 것이었다. ‘참하고 예쁜 신붓감’이 되기 위해 쌍꺼풀이 필요하다고 했다. 반색하는 엄마와 달리 고작 한 줄로 남은 눈의 흉터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상흔을 남겼다.




첫 아이가 딸인 것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남편을 닮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얼굴을 닮은 딸일까 봐 두려웠다. 태어난 딸을 보고 실망한 마음을 누가 알 세라, 그 누구도 아닌 딸이 알면 큰일이다 싶어 꼭꼭 숨겨두었다. 그런 마음은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고 딸을 대하는 온도는 끝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미안함에 더 사랑하고, 그 사랑은 금세 지쳤다. 그러면 또 미안해서 더 사랑했다.


커갈수록 딸아이는 내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닮았다. 엄마는 그런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시고 나는 그 옛날의 엄마처럼 딸아이의 얼굴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를 닮은 나를 닮아버린 딸을.


비슷한 얼굴과 달리 성격이나 성향이 다른 딸아이와 자주 말다툼을 한다. 아니 적확히는 다툼이라기보다 나 혼자 화를 냈다, 삭혔다, 사과했다를 반복하는 꼴이다. 딸아이에게 놀랍도록 냉정하고 무심한 나를 발견할 때도 무섭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를 꼭 끌어안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기괴하여 더 선득하다.


그날도 말다툼 끝에 버릇없이 말하는 딸을 두고 뒤돌아 서며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라고 작게 혼잣말을 했는데 등 뒤로 큰 소리가 들렸다.

“누구한테 배웠겠어? 엄마한테 배웠지!”

딸에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순간 화가 나면 혼잣말을 쏟아내시던 엄마가 떠올라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의 혼잣말을 듣는 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그때의 나는 이제 그 입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떼도 쓰지 않고, 가정 형편을 생각해 뭘 사달라고 하는 법도 없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도 엄마가 원하는 곳으로 갔던 내가 앨리스 밀러가 말하는 바로 그 천재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 없이 살다 보니 두 딸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이제 내가 두 천재를 길러내고 있다는 것이 오늘 저녁에도 증명되었다. 어김없이 딸과 투닥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낸 주말 오후, 딸이 갑자기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에게
엄마 내가 엄마와 다툴 때도 있지만 엄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때로는 눈물이 나고 짜증이 날 때도 있자만 괜찬아 엄마에겐 소중한 내가 있잖아.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겄처럼 엄마도 나를 사랑할거야. 내가 메일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서 미안해 하지만 이제 나도 짜증 안내려고 노력할깨 사랑해”


맞춤법을 틀려가며 적어 온 딸아이의 편지 속에는 잘못한 엄마는 없고 잘못한 딸만 있었다.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딸이 있었다.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애를 썼던 나도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썼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편지였다. 엄마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고 있는 스스로가 엄마보다 더 밉다.


초반에 모녀서사 강의를 들으며 죄책감을 좀 줄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생한 죄책감에 휩싸인 채 마지막 수업에 제출할 글을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 서로의 불행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을 없애는 방향으로 모녀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강의 목표에 한참이나 도달하지 못한 낙제생이 되었다.




나를 미워하는 일이 결국에는 엄마와 딸을 미워하는 일이 될 것 같아 우선은 엄마, 나, 딸의 관계를 모두 따로 끊어내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원초 비극’(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주체로 서는 것만이 딸아이가 나와 똑같은 성장기를 보내지 않을 방도가 아닐까. 그때는 나도 딸도 각자의 말로 영혼의 모어를 갖고 있기를.



엄마와 나의 간격

                                   허수경


엄마의 자궁 안에서
나는 엄마, 속의
섬이었다


섬은 엄마에게서
몸의 식량 공급을 받았다
영혼도 넙죽 식량 공급을 받았겠지

날을 채우고
섬은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원초 비극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영혼의 모어가 생겼다
엄마 말이 아닌 내 말로

그 생각을 하니 웃기고도 서글프다
겨울 숲에서 혼자 병들어 죽어
풍장되는 늑대의 아가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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