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어떤 상징이었다. 2025년에 난 이 세상에 나만큼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직장인 5년 차, 연차와 경력이 쌓였다. 일 돌아가는 건 손바닥 보듯 훤한 것 같았다. 세상만사 다 알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바쁘고 불쌍한 것 같은 오만한 서른이었다.
그 해 그를 만났다. 우린 서로의 협력업체 담당자로 두 달간 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를 만난 후, 일터에서 종종 그의 명함을 꺼내 들여다보게 되었다. 오늘도 그는 어딘가에서 치이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일하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어쩐지 힘이 났다.
제 얘기 들었어요? 그럼 나 성질 더러운 것도 알겠네?
첫 만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ooo입니다.' 인사 후에 돌아온 말이었다. 당황했다.
하하, 그런가요? 제가 잘해야죠. 잘 부탁드려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준비한 서류들을 꺼냈다. 날이 서있고 껄렁껄렁한 사람이었다. 말이 애매하게 짧아서 거슬렸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와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해야 한다. 나와는 초면이지만 상사와는 여러 번 프로젝트를 함께 한 사람이었다. 까칠한 것 같은데, 기본은 되어있으리란 희망을 갖는다. 우린 갑을 관계가 아닌 파트너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힘든 프로젝트였다. 준비 단계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종 그에게 물어보고, 부탁할 게 생겼다. 프로젝트 중간에 그는 내게 '멱살 한 번 잡아도 되냐'라고 물었고, 나는 '10초만 잡게 해 드릴 테니 얘기를 좀 들어보시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멱살은 잡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어떤 문제로 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와 함께한 프로젝트를 끝으로 나는 퇴사했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만났다.
우린 어떤 순간들을 나눴다. 일터에서 만난 누군가가 한 인간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일하는 사이에 일 얘기만 하는 칼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꼭 눌러보는 부류에 속한다. 개인사, TMI를 환영하는 사람이다.
첫 만남 후 그의 카카오톡을 프로필을 클릭했다. 그의 카톡 프로필은 가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굳이 멀티 프로필을 설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그는 어떤 장소에서 딸 얘기를 꺼내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슬며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줬다. 귀엽다고 감탄하면 입꼬리가 슬쩍 더 올라갔다.
그리고 일터에선 한없이 치열하고 거칠었다.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안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대안을 가지고 왔고, 안 되는 이유는 납득 가능하게 설명했다. 책임과 역할을 정확하게 나누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고 바쁘다 생각한 오만한 서른은, 그를 떠올리면 겸허해졌다. 그는 한 부서의 팀장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에게 메일을 보낼 땐 다정한 문장을 한 줄씩 챙겨 넣었다. 그에겐 꾸준히 다정했고 친절했다.
퇴사 후 동료나 상사를 만난 적은 있어도, 협력업체 담당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남쪽 지방에 사는 그가 경조사로 서울에 올 일이 생겼다. 마침 우리 집 근처라 잠깐 얼굴을 봤다.
살도 안 찌고 피부도 좋네.
외모 평가에 기분이 상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퇴사 후 쉬고 있다는 내게 '살은 좀 쪘냐'라고 물었다. 프로젝트 당시에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살이 좀 빠졌다. 프로젝트 마지막 날, 그는 내가 말라가는 것 같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피부야 뭐, 백수 시절에 더 좋은 거야 당연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상징이다.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상징. 그리고 내가 계속 다정해도 된다는 상징. 그는 대단한 꼰대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면 말도 짧고, 외모 평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다정했다. 내가 야위어 간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이고, 지나가듯 한 우리 오빠의 결혼 소식 같은 TMI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내가 다정한 만큼 그도 나를 기억했다. 그리고 우리의 TMI가 쌓이는 것과 별개로 치열하게 일했다. 앞으로 이런 파트너십이 또 있을까. 이런 관계가 최고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 까칠한 누군가 다시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또 다정하고 성실하며 치열할 수 있다. 기대 없이 그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