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톡스가 필요해
'혹시 알레르기 있으신가요?'
외국에 살며 자주 주고받는 질문 중 하나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한 음식이 다른 이에겐 치명적인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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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외부 모임 중 식사 내내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의 자식에 대해, 남편에 대해, 파트너에 대해
그리고 항간에 떠도는, 아니 옛날에 떠돌았었었-었던 소문에 대해.
최소 서른 명의 이름이 오고 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똥이나 싸러 가야겠어"
다른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더니
이젠 어떤 기업인의 첩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첩이 낳은 자식이 누구인지 짐작까지도 한 것 같다.
이미 자리를 한번 떠났다가 돌아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다양한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그 시간에 내 어느 것 한 줌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공간의 인테리어를 살피고 사진을 찍었다.
나름 그 시간을 내 식대로 즐기려고 노력한 가느다란 애씀이었다.
어떤 한 사건은 나만 모르고 그들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니 '한국인 맞으세요?' 하는 눈빛으로 내 어깨를 짚으시며 웃으셨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저 사람들은 이 모든 걸 다 아는 거지??
오히려 나도 저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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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활유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
너무너무 재밌고 유익하게 듣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오늘 나는 내 알레르기를 알아차렸다.
고통스러운 것을 굳이 내 시간과 돈을 들여 내게 허락하고 싶지 않다.
깊은 관계가 아니기에 그런 이야기밖에 나올 수 없는 걸까.
대화 전 미리 소화 가능한 것만 추려 제한하는 방법 어디 없나요.
화장실 가는 게 제일 유익하다 느껴졌다니. 씁쓸하구먼.
집에 와서도 장본 것을 냉장고에 넣고 나니 아무것도 할 힘이 없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쇼파에 가만히 앉아 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속에 가득 팽창되어 있는 듯한 불편감을 천천히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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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랜 친한 친구와는 못할 대화도 없이 내 못남까지 소재로 만들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 사람의 이야기가 참 궁금한데
아쉽게도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의 삶만 전해 들었다.
내 인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면 까먹을걸.
유려한 말솜씨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대화가 서툰 사람에 더 가깝다.
하지만 최소 '내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서로 균형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 그리고 에너지가 채워지는 대화가 고프다.
오늘은 명백히 소진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