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팔광땡 노처녀 무작정 퇴사하다
마음의 소용돌이
실종 된 고3 겨울 방학
2005년 12월 31일.
고3 겨울 방학의 시작점이자 스무살의 시작
맞물린 시간을 즐기려 친구들은 해돋이를 떠났다.
이틀 뒤 타향살이가 예정되어 있던 나는 그 길을
동행 할 수 없었다. 가족과의 시간이 1분1초가
너무도 소중했다.
고도비만으로 1차례 낙방하고
여름방학동안 20kg를 감량 성공으로
재지원해 붙은 회사였지만
막상 떠날 날이 되니 매일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년 반쯤 출근길 집 현관에서 쓰러져 돌아가신
엄마가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숨 죽이며 울다가 한 방에서 자고 있는
9살이나 어린 남동생을 보자면 코 끝이 찡하다 못해
넘어가는 숨이 목을 지나 가슴을 쪼이며 훑는게 느껴졌다.
크게 소리내 울 수 없었다.
엄마가 증발하다시피 우리 곁에서 떠나고 난 뒤,
본래 의미의 우리 가족은 해체되고
고령의 할머니와 미혼의 고모 두 분까지
우리가족의 범위로 재결성 되어 같이 살게 되었다.
정확하겐 할머니와 고모들의 희생으로 우리를 품어줬다.
방이 3개인 복도식 32평 아파트에
할머니, 큰고모, 작은고모, 아빠, 나, 여동생, 남동생을
담기엔 역부족이였다.
할머니가 제일 작은 방을 쓰셨고, 고모 두분이 중간방
본래 우리 네식구가 큰방을 썻다.
그렇게 갑자기 단칸방 아닌 단칸방 생활을 하다보니
마음껏 소리내 울 수도 없었다.
울며 잠든 사이 해는 떴고 2006년 1월 1일이 되었다.
옛기억이 아주 좋은편인데 저 날은 무얼했는지
기억이 없다. 벌써 18년전 일이다.
기억에서 잊혀져 버린 평범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가고
대망의 그날이 왔다.
2006년 1월 2일. 예비소집일
이불 보따리와 함께 나는 아빠차를 타고
울산에서 구미까지 올라왔다.
초행길이라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메뉴는 삼겹살. 맛있었다.
나중에 한참의 시간이 지나 고모께 들은 이야기로
아빠는 혼자 남을 내 걱정에 한 점도 안 먹었는데
나혼자 고기를 아주 야무딱지게 3인분을 다 먹고 갔다고
우스깨로 그날 밤에 나의 뒷담화를 하셨단다.
얼떨결에 불효를 저질렀다.
구미 지명이 익숙해질 무렵 아빠와 나는
그곳이 비산동이라는걸 알았다.
그렇게 나만 배부른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아
동락공원이라 적힌 곳이 주차하고 시간을 떼웠다.
공원이라고 믿기지 않는 비쥬얼이였다.
2차선 도로를 두고 공원이라 부르는 그곳과
까만 쇳가루가 묻은 공장 건물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당시는 카페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고
구미 시내에만 한 두곳 있었으니
네비도 없는 시절 추운겨울 차 안에 있는게 최선이였다.
시간에 맞춰 LG.Philips.LCD 2공장 정문에 도착했다.
나를 배웅하는 아빠 모습이 슬퍼보였다.
짐작컨데 그날 아빠는 혼자 울산까지 많이 울면서 내려가셨을거다.
고등학교도 졸업식도 하기전인
어린 자식을 외지 공장에 일하러 보냈다는 것에
18년이 지난 지금도 미안해하고
마음의 빚으로 남겨두시는 부성애가 너무 강한
우리아빠
희망퇴직 마감을 하루 남겨두고
회사 휴게실에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대 할 줄 알았던 아빠가 바로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날 저녁에 소고기를 사주시며
그동안 고생했다고 더 긴 세월 지쳤을 아빠가
그보다 조금 지친 나를 위로하셨다.
입사 때 삼겹살이 퇴사땐 소고기로 바뀔 만큼
나도 고생했고 아빠는 더 고생하셨다.
그렇게
무작정 퇴사
한달 반
저 날의 감정들과 오늘의 감정선이
겹칠듯이 밀칠듯이 포개지며
새벽녘 나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눈물샘도 터트려버렸다.
불면증에 밤낮까지 바껴 매일 밤 힘들었는데
오늘밤은 그 불면증이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