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휴가)를 간다. 칠성급 호텔에서의 1박 2일 상품권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해 호텔 주위 관광 명소를 둘러본 후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저녁거리를 사가서 호텔방에서 먹기로 한다. 핫바와 만두를 먹으며 호텔 창문으로 현란한 야경을 본다. 호텔 앞 큰 빌딩에는 이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다. 저 불 켜진 데서는 다들 일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아들이, 일을 하는 데도 있고 그냥 켜 놓는 데도 있다고 한다.
달리 할 것도 없어 침대에 누워 책을 넘겨 보다 아들에게 '엄마가 필사해보고 싶은 글을 발견했는데 한번 들어보겠냐'라고 슬쩍 묻는다. 무심히 폰을 들여다보던 아들이 웬일로 그러라고 한다. 서너 장 분량이라 부담 없을 거라며 읽기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고색창연한 글로, 조금은 생소한, 문둥탈을 쓰고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문둥북춤’ 공연 관람기다. 케이팝에 익숙한 요즘 젊은 사람들 취향에는 맞지 않을 텐데도 잘 듣는다. 절반쯤 되자 내용이 고조에 달한다. 한껏 도취되어 읽는데 갑자기 아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대체 언제 끝나요?" “왜 이리 길어요?” 올 게 왔구나 싶다. 마음속으로는 '아직 멀었는데 큰일 났네. 그만 읽으라 하면 어쩌지' 걱정하지만 겉으로는 "한 장 남았어. 금방 끝나. 마지막이 압권이야."라며 큰소리친다. 급한 마음에 남은 부분은 후다닥 읽어 내려간다. 이렇게 주마간산으로 읽을 글이 아닌데…….
춤이 다 끝나 탈을 벗은 춤꾼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다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5분 남짓의 춤이지만 그들(한센병자)의 풀 길 없는 한과 설움이 온몸으로 느껴져 울지 않고는 출 수 없다는 문둥북춤의 애통함과 절절함이 아들에게 전달이 되었을까. 다 읽고 아들을 보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눈을 폰에서 돌리지 않는다. 끝까지 읽게라도 해 준 게 어디인가 싶다.
다음 날 아침 집으로 오며 이런 담담하고 조용한 여행이 참 값지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한 랜드마크에 간 것도, 값비싼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었으나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물론 아들은 엄마가 읽어주는 엄숙한 글줄을 접하느라 난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갈래의 고민이 무성하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환기됨을 느꼈다. 똑같은 글도 어디서 누구와 보는지에 따라 감흥이 달라진다. 집에서 별생각 없이 읽을 때는 나와는 멀게만 느껴졌던 한센병 환자의 절망과 통한이, 아들에게 읽어줄 때는 더 가깝게 와닿았다. 천형이랄 수 있는 큰 병의 고통을 탈춤이라는 한바탕 공연으로 풀어놓는 선조들의 따뜻한 안목과 해학이 놀랍고도 멋지다.
나와 상관없는 세상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에게는 오지 않을 병이 있을까. 남일로만 여겨졌던 일들이 곧 내 일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벗어날 길 없는 아픔과 애환을 문둥북춤이라는 애달픈 춤사위로 승화시켜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감싸안는 그 넉넉한 성정을 마음에 담는다. 나에게 주어진 어려움에 대해 남탓하지 않는 성숙한 인격을 언제나 갖추게 되려나.
며칠 후 호캉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나에게 “너네는 참 똑같이 건조한 이과理科 모자야. 대화도 기호로 하지 않니?”라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무미건조한 여행이었을지언정 이번에는 '문둥북춤'이라는 색다르고 정감 어린 공연을 아들과 함께 음미했다. 이런 소소한 풍경이 나에게는 의미 있다. 살아가기 위한 근거랄까.
아들에게 읽어 준 글의 일부분이다.
"경상도에서 친한 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났을 때, '아이구, 문둥아!'라고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추醜에서 정을 느끼고, 정을 강조하는 데 동원한다. 여기에 정의 미가 있다. 추를 애써 떨쳐 버리려 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따뜻이 감싸 주려는 마음. 이것이 정에 약한 우리 민족의 끊을 수 없는 심성이다. 문둥이를 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마음으로 이웃사촌쯤으로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가움이 '아이구, 문둥아!'로 표현되는 것이다." (정목일의 ‘문둥북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