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뜸했던 선배를 오랜만에 만난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오래 근무했던 그녀가 옛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유산 상속으로 형제들과 다툼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형제간이라도 유산 분배에 있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법이라며, 형제도 부모 계실 때와 안 계실 때가 다르다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선배는 자식이 가까이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력을 위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쩌면 아버지의 완고함이 싫어 긴 외국행을 감행했다. 그 결과 명예와 부를 갖추었으나 지금은 후회가 된다고 한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 아니냐,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거 아니냐라고 하자 선배는 “그럼 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하늘이 무너졌는데. 출세며 돈이 무슨 소용이니?”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오래전 DJ(전 대통령)가 돌아가셨을 때 한명숙 씨(전 국무총리)가 했던 말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큰일을 많이 겪을 텐데 이제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가….” 많은 상념을 불러오는 말이다. 진정한 어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자식들에게 젊은이들에게 어떤 어른인가 자문해 본다.
오래전 영화 ‘어바웃 타임’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성인이 된 아들에게 가문의 비밀을 알려준다. 그 가문의 자손들에게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비밀을 알려주며 아들에게 행복의 공식도 귀띔해 준다. 과거로 되돌아가면 하루를 예전과 똑같이 살되, 긴장과 걱정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껴보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면서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작은 것들을 다시 쳐다본다. 샌드위치 가게 점원과도 눈인사를 하고, 멋진 자연과 건축물들에도 관심을 갖고 다시 들여다본다. 그러자 첫 번째 인생에선 피곤하고 지루했던 하루가 두 번째 인생에서는 살 만한 하루로 변한다.
영화 속 부모처럼 자식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지는 못했지만 어느새 나도 어른의 위치에서 서성인다. 내가 겪은 인생의 풍상을 통과할 자식들에게, 그들의 친구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인생이 안 풀린다고 위축될 것도 없고, 잘 풀린다고 오만할 것도 없다고. 실수는 인생의 한 경험일 뿐이니 실수했다고 너무 움츠러들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고 싶다.
진정한 어른은 ‘낮의 촛불’과 같은 게 아닐까. 환한 낮에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묵묵히 타고 있다가 주위가 어두워지는 밤이 오면 주위를 환하게 해 주는 촛불. 묵묵히 자신을 사르며 어둠을 밝혀주다 조용히 사그라드는 그런 촛불이 되고 싶다. 나를 말없이 믿어주며 든든한 보루가 되어주던 나의 어른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