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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백 Apr 25. 2021

안락한 자책에서 벗어나기

한없이 덜 미숙해지기 위하여


  타인의 감정을 허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후회나 자괴감이 어디 절대적 수치로 측량 가능한 성질의 것도 아니라지만, 구태여 무언가 대답을 해보자면 나는 그런 류의 감정들에 쉬이 빠지는 편이다. 

  일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대체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는 후회와,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사이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이리저리 시뮬레이션도 돌려보고, 다른 평행세계의 결과도 한가득 그려보다가... 결국 먼지 쌓인 생각의 구석 한쪽으로 어떻게든 밀어 넣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련의 과정은 아니다.


  자책은 그 자체로는 보기보다 간편한 자기 도피 수단이다. 얼핏 나 스스로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자아의 분리에 가깝다. 이 '나'는 잘못했으니 욕먹을만한 나. 반대편의 나는 그런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그러니까 저지른 잘못이 없는 나. 그저 자아를 객관화하는 것, 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에 스스로 속아 두는 자충수. 마치 지각한 수업에 뒤늦게라도 들어가기보단 자체 휴강으로 도망쳐버리고, 순조롭게 패배로 향하고 있는 게임 막바지에서야 아, 이번 판은 연습이었다. 다음부터가 제대로다.라고 괜스레 중얼거리게 되는 것과 비슷한 심리 아닌가.


  못난 나와 그렇지 않은 나를 분리하고자 하는 욕심. 자책의 함정이다.


  본인의 미숙함을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참된 어른이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34세까지는 청년이라는 이 시대의 기준을 참 충실하게 지키고 있지 않나 싶다. 90년대생의 이 비대한 자아를 어쩜 좋나. (사실 이것마저 도피다. 이게 어디 집단의 문제겠나, 내 문제겠지.)





  

  다만 그 뒤늦은 깨달음 다음에도 이를 유의미한 반성으로 잇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블랙박스에 녹화된 뺑소니를 탓하듯 납작한 말 얹기는 쉽지만 전후관계 세밀히 들여다보고 정말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래서 그 부분만 고치면 되는 일인지, 내가 미리 알아야 했으나 알지 못했던 전제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보는 일은 괴롭다. 뺑소니 차량 뒷좌석에 만삭의 임산부가 앉아있을지는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불쑥불쑥 생겨나는 자기 합리화는 (아니면 내가 그렇지 뭐, 와 같은 자포자기의 심정은) 그 즉시 잡아 돌려놓지 않으면 터 큰 화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몇 번의 장렬한 헛발질 후에는 그냥 내려놓고 싶어 지는 것이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내어놓은 결론마저 확신 가지기 쉽지 않으니 더더욱 그런 충동이 고개를 치켜든다. 이 결론에 내 편향적인 시선이 들어가 있지는 않나? 알게 모르게 내 행동에 조금 더 후한 점수를 주는, 편파적인 심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나? 이것마저 틀린 대답이라면, 그래서 다음번에는 더더욱 악화된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어디 맨 땅에서 나왔겠나......


  그럴 때면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틀릴 수밖에 없다. 고친다고 나아질 것이라는 것은 내 환상이다. 나는 틀렸고 한참을 더 틀릴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 여덟 방향 다 발 디뎌봐야 하지 않겠나. 가나안은 못 찾아도 별자리 읽는 법은 배우겠고, 운 좋다면 갈증을 해소할 오아시스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이 우주는 아주 초기의 형태를 띄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고 그 팽창하는 우주 안에 우리가 유일한 -바꿔 말하자면 최초의- 생명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미 구성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가고 있는 미완성 우주에 살아가고 있는 미완성 생명체.


  그 말대로라면, 나는 탄생 중인 우주에서 함께 태어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니 미숙한 세상에서 미숙한 삶을 산다는 것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닐 테다. 한없이 1에 가까워지기만 하고 기어코 완벽한 1이 되지 못한다 해서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닌 것처럼, 다만 한없이 덜 미숙함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삶도, 그 미숙의 과정도 그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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