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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백 Dec 13. 2021

뭐라도 써보기

제목에 충실한 '뭐'

뮤지컬 <아가사>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자신의 어린 조수인 레이몬드 애쉬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작가란 뭘까? 예전에는 조금 더 확고한 기준 (그러니까, 출간한 책이 있느냐, 기고된 사설이 있느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블로그가 생기고, 티스토리가 생기고......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그 글을 보여줄 수 있는 창구가 끝도 없어진 요즘은 모두가 어느 정도는 작가인 셈이 아닌가 싶다.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을 셀링 하는 것과 비슷할 테고, 그게 바로 요즘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멋진 미덕인 것처럼 보여서.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적절한 배경 설명 곁들임 없이 내 얘기를 하다간 오해를 사기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기 쉽다. 물론 유려한 단어 선택 능력을 지녔거나 비언어적인 소통에 유능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 아니겠으나, 이 말을 굳이 적는다는 건 내가 위 두 케이스 중 어느 쪽에도 그다지 타고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글로 넘어오면 조금 달라진다.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메신저가 아닌 이상, 대체로 즉각적인 반응에 대답하기보단 문단의 시작과 끝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것이 조금 더 중요하다. 단어 선택과 맥락 설명만 잘해두면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더 편하다. 애초에 아무런 말이나 적는 것은 쉽다. 글을 배우고, 쓰는 법을 배우면서 수많은 글이 의무교육 과정으로 들어가 있으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글쓰기란 결국 일기와 다를 바 없어서 마음 불편할 것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는다고 상정하면 그때부터 키보드 위 손가락이 머뭇거려지기 시작한다. 접근성이 좋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글이 보일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하고, 똑같은 하나의 문장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읽냐에 따라 오천 개의 해석이 나온다. 흡사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전부를 납득시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오해 살 일 없이 좋게 좋게 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자꾸 글이 끝도 없이 길어지다가... 결국에는 전부 지워버리게 된다. 말을 하질 않으면 오해 살 일도 없지, 뭐 그런 듣기엔 좋은 말이나 하면서.


근래에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괜히 입 열어서 오해 사고, 사이는 서먹해지고. 말로 생긴 오해이니 결국 말로 풀어내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일들이 엉키니 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 부담스러웠다.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졌더니 기이하게도 무언가 쓰는 것마저 부담스러웠다. 사견을 빼고 써볼까, 시도해봤지만 과제 리포트도 결론 없이는 D+인데 글이라고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셈이 되었다...... 

아무튼 평생을 그럴 수는 없으니까, 일단 다시 뭐라도 써본다. 원래 완성된 졸작이 완성되지 못한 명작보다 낫다고, 글도 일단 뭐라도 써서 물꼬를 틔워놓으면 물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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