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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thB Sep 08. 2023

엄마도 그럴 때가 있었어

시에서 찾은 육아의 말들#2

후다닥.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옷장을 헤집으며 치마며, 스타킹을 찾는 아이를 보며 직감했다. "남자 친구들하고 같이 놀아?" 아이는 흠칫한다. 딸아, 엄마도 어릴 적에 남자애들하고 좀 놀아봤단다, 놀랄 거 없어. 하지만 남자아이들과 거리 두기도 모자라서 원수처럼 지낸다는 소식을 워낙 많이 접한 탓에 나도 물으며 설마 했다. "아니, 걔네들이 우리랑 같이 놀고 싶대서……."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는 아이의 표정에서 사춘기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의 숲이 생기는 시기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도 남자애들하고 놀기 전 집에 들러서 제일 예쁜 옷을 입고 나갔단다."

"으하하, 왜?"

"좋아하는 애가 있기도 했고, 친구들이 다 날 좋아했으면 하고 생각했거든. 그러려면 제일 예쁜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너도 제일 예쁜 옷, 좋아하는 옷 입고 나가서 놀다 와."

"엄마, 나 그 정도는 아니야."

 뭐가 그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이성 친구와 놀 때 꾸밈은 기본 아니던가.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와 함께 공감을 받은 아이도 이 상황이 재밌는지 옷을 갈아입다 말고 질문을 쏟아 낸다. 엄마가 좋아하던 남자아이는 잘생겼는지, 성격은 어땠는지, 둘이 사귀었는지 등등. 아쉽게도 혼자 좋아하고, 홀로 이별한 사실을 알려준다. 안타까워하던 아이는 "괜찮아, 아빠랑 결혼하고 우리도 낳았잖아."라며 위로한다. 결혼 전 20년간 겪은 수많은 외쪽 사랑의 과정을 모르는 아이로서는 엄마의 사랑은 늘 해피엔딩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중략)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서시 일부/이성복>




아이와의 일화로 짝사랑에 몰입하던 때가 떠오른다. 미술 학원에서 그의 물통에 일부러 내 붓을 씻던 기억. 투덜대던 녀석에게 선심 쓰듯 건넨 내 수건을 받던 그 아이의 손, 그 친구가 지나는 집 주변을 서성이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도모하던 그때를 말이다.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보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정처 없던' 수많은 날이 되살아났다.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시의 화자는 당신을 불렀다. 고백이었을까? 내 목소리가 춤춘다고 느껴진다면 고백은 받아들여진 것일까? 나 역시 '사방에서 번쩍이며 흘러나오는 새소리' 같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에게 표현하고, 용기 냈다. 수많은 실패를 하고 가끔의 성공도 했다. 이제야 조금 알 듯하다. 인생의 의미는 성공이 아니라 시도에 있는 것이고 수많은 시도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집 10대도 그런 경험을 시작하리라 생각하니 벌써 뭉클하다. 사랑은 모든 면에서 아이를 성장시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훗날 아이가 나에게 연애상담을 요청한다면 (않을지도 모른다) 짝사랑 경험 선배로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마 백 마디의 도움말보다 온몸으로 공감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또 사랑에 대한 시를 모아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 두어야겠다. 지치고 힘들 때 시들이 치유와 위로의 언어가 되겠지. 그리고 외칠 것이다.


"소중한 딸이 좋아하는 사람아! 아이의 진심을 알아봐 주렴, 너를 부르는 우리 애의 '정처 없는' 목소리를 들어주렴. '문득'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니 어서 속히 응답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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