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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Dec 28. 2020

<남산의 부장들>

불안한 정신을 담아낸 담담한 그릇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핵심은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은유다. 이는 로버트 맥키가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강조한 말인데, 나 역시 이에 크게 공감한다. 물론 어떤 영화를 보고 '좋다'라고 했을 때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배우의 연기가 좋거나, 촬영이 멋지거나, 음악이 인상적이거나, 시각 효과가 뛰어나거나 등등. 하지만 긴 시간 동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좋은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훌륭한 이야기'라는 강력한 기반에서 만들어졌다. 이때 훌륭한 이야기는 바로 삶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소재가 관객들에게 익숙한 것이든 생소한 것이든 간에 좋은 영화란 그 소재로부터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떤 메시지와 관점을 던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0년 1월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은 10. 26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 관객들 중 다수가 한 번쯤은 들어본 소재다. 나 역시 그러한 관객 중 한 명으로서 해당 사건에 대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서면서 내가 가진 기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고 싶다. 둘, 이 영화만의 10. 26에 대한 고유한 해석과 관점을 제공받고 싶다. 물론 '좋은 영화'를 기대하며 보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나의 삶과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함께.


 영화는 10. 26 사건 당일 중앙 정보부장 김규평(실제 인물 김재규, 이병헌 분)이 박통(실제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 이성민 분)의 저격을 결단하는 모습으로부터 출발해 그 직전 40일 동안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축은 박통을 중심으로 김규평, 박용각(실제 인물 김형욱, 곽도원 분), 곽상천(실제 인물 차지철, 이희준 분) 세 인물이 진정한 2인자가 되기 위해 보여주는 충성과 버림받음 그리고 복수다.

박용각과 만나는 김규평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전 중앙 정보부장 박용각은 세 인물 중 처음으로 박통으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세 번 반복해서 나온 박통의 대사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를 처음으로 들은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박통이 모든 것을 책임져줄 테니 자신을 위해 그 어떤 일이든 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리는 저 대사에는 사실 아무런 책임 소재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저 2인자인 박용각은 저 말을 자신에 대한 최고 권력자의 전적인 신뢰와 지지로 해석하고 박통을 위해 갖은 폭력을 감행해 정적들을 회유하거나 제거한다. 하지만 박통은 실제로는 그 어떤 책임도 약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후 정치적 문제가 생겼을 때 2인자를 버릴 뿐이다.

 박통으로부터 버림받은 박용각은 미국으로 망명해 회고록을 작성하고 로비스트 데보라 심의 도움으로 미 하원 소위원회에서 발언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박통의 비리와 인권 유린을 고발한다. 이 소식을 접한 박통은 김규평에게 박용각을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김규평은 추후 문제가 불거질 것을 대비해 박용각을 설득해 회고록 원본을 회수하고, 박용각으로 하여금 더 이상 박통 문제를 언급하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조용히' 정리한다. 사실 김규평은 여러 정치 현안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방향을 선호하는데, 18년의 장기 집권으로 국내외적으로 정세가 불리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상천이 청와대 주변에 배치시킨 탱크와 대치중인 김규평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반면 박통의 총애와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는 경호실장 곽상천은 사사건건 김규평보다 강경한 방법을 선택한다. 대통령 집무실에 미국이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고 주장하며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놓고는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탱크를 배치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규평은 군 후배이면서도 자신과 맞먹으려는 곽상천과 주먹다짐까지 하며 마찰을 빚는다. 하지만 곽상천은 자신의 측근 전두혁 장군(실제 인물 전두환 전 대통령, 서현우 분)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하는데 힘을 써놓는 등 청와대 내 입지를 굳혀가며 박통의 마음을 얻어간다.

 2인자 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한 김규평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워싱턴에서 김규평은 박용각으로부터 박통이 중앙정보부 이외의 인물을 통해 비자금을 관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듣는다. CIA에서 '이아고'(셰익스피어 <오셀로>의 빌런)라 칭하는 미지의 인물을 둘 정도로 박통은 사실 자신을 비롯한 중앙정보부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곽상천이 보안사를 통해 자신을 도청하고 자신의 모든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김규평이 박용각으로부터 얻어낸 회고록 원본이 유출되어 일본 잡지에 실리는 등 갈수록 박통의 마음에서 김규평은 멀어져만 간다. 이제 2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김규평. 그는 고민하다가 박통과 둘만의 사적인 자리에서 박용각이 들었던 그 대사를 듣는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홀로 남겨진 김규평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김규평은 박용각과 마찬가지로 박통의 그 말을 자신에 대한 신뢰와 지지, 그리고 박통의 마음을 살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이고 박용각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곽상천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데보라 심과 협력해 곽상천에 앞서 박용각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김규평. 하지만 회고록 유출 등으로 김규평에게서 떠나간 박통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게다가 부산 소요사태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마찬가지로 '조용히' 법적 절차 내에서 처리하고자 하는 김규평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고자 하는 곽상천 사이에서 박통은 곽상철의 편을 든다. 급기야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술자리에 김규평 없이 곽상천만 자리하게 된다.  

 이때 김규평은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2인자 답지 않게 직접 도청장치를 들고 궁정동 안가에 잠입해 박통과 곽상천의 대화를 엿듣는다. 불안은 사람을 안전한 자리에서 벗어나 어떤 일이든 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산 소요사태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곽상천과 통화하는 박통은, 곽상천의 도청을 통해 김규평이 주한 미국 대사와 만나 박통이 '끝나간다'는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박통은 곽상천에게 김규평을 처리할 것을 암시하며 그 대사를 한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이 말을 들은 김규평은 마음을 먹는다. 자신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박통을 끝내기로.


 여기까지가 영화의 큰 줄거리이다. 영화는 과하지 않은 화법으로 담담하게 당대의 사건들을 재조립해나간다. 소위 말하는 신파나 격한 액션 장면 없이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김규평을 따라가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과연 인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훌륭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영화는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적합한 형식을 취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을 때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초두에 언급했던 이 영화에 대해 기대했던 점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선 이 영화를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어떤 것이 있었나? 바로 김규평-곽상철 사이의 갈등, 그로 인한 2인자 자리의 '불안'이다. 실제 인물이었던 김재규와 차지철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2인자 자리의 '불안'이라는 정서가 강조되면서 이미 알던 사실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시선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시선과 역사적 사실들의 조합을 통해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해석과 관점을 제공받았는가? 이 영화가 과연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자. 김규평의 박통 살해, 중앙정보부로 달려가다가 멈춰 서서 육군본부로 U턴하는 김규평의 차량, 김규평이 육군본부에서 군법재판에 넘겨져 교수형을 언도받았다는 자막, 비자금 금고를 비우다가 대통령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권력욕이 발동하는 전두혁, 그리고 실제 전두환과 김재규의 육성.

 아쉽게도 나는 이 시퀀스들의 조합으로부터 명확한 메시지를 포착해내지 못했다. 시퀀스의 조합으로부터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면 그것들은 단순한 이미지들의 나열이 된다. 게다가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미지들일뿐이다. 이렇게 영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10. 26에 대한 이 영화만의 고유한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영화'에 대한 최종적인 질문인 "이 사건이 나의 삶과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질 수도 없었다.

김규평과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곽상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2인자의 불안'이라는 정서였다. 의문점은 이 영화의 미덕이었던 '담담한 화법'이 그 '불안한 정서'를 표현하기에 과연 최선의 형식이었냐는 것이다. 익히 알려진 현대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곳곳에서 불안이라는 정서에 집중해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시선을 훌륭하게 제시했다.

 가령 김규평과 곽상철이 청와대 집무실이라는 공적이고 격식 있는 자리에서 욕을 남발하며, 아니 너무도 분노해 욕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며 똑같을 말만 반복하며 싸우는 장면. 영화의 전반적인 모노톤을 뚫고 나왔던 이런 장면은 '불안'이라는 정서에 집중했기 때문에 선택 가능했던 연출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이러한 정서에 좀 더 집중해서 밀고 나갔다면 김규평이라는 인물, 실제 인물인 김재규에 대한 새로운 모습이 이 영화를 통해 조명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게 됐다면 극 중 인물 김규평에게 더 이입하며 '나였어도 저랬을 텐데,’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등의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 때 비로소 나는 영화를 통해 나의 욕망, 나의 정서, 나아가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물론 관객이 잘 이입하고 몰입해야만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이 아쉬웠던 점은 해당 사건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무기인 '2인자의 불안'이라는 시선을 발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김규평을 좀 더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불안이라는 위태로운 정서를 다큐멘터리나 보도에 가까울 정도로 거리를 둔 객관적인 톤으로 풀었다는 점이 서로 상충했다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인 '잔 다르크'의 일화를 다룬 다양한 작업들에 대해 언급한 로버트 맥키의 글을 함께 살펴보자.


 장 아누이의 잔 다르크는 영적인 인물이었고 버나드 쇼의 잔 다르크는 재치가 있었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잔 다르크는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가 고통받는 인물이었는가 하면 할리우드가 그려낸 잔 다르크는 낭만적인 전사였다. 셰익스피어는 그녀를 당시 영국인의 시각대로 위험한 정신병자로 그렸다. 이 모든 작품에서 잔 다르크는 똑같이 성령의 지시를 받고 군대를 일으켜 영국군을 패퇴시킨 뒤 화형을 당한다. 잔 다르크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항상 동일하지만, 그녀의 삶에 진실에 작가들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장르가 변하는 것이다. (로버트 맥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이승민 옮김, 민음인, 2015, pp.45-46)


 잔 다르크의 이야기만큼 10. 26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어떤 영화나 매체에서 다루든 사건의 내용은 항상 동일하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해당 사건을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갈 것인지, 그 인물의 삶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메시지가 정해지며, 그로부터 영화의 톤, 매너, 나아가 장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주인공 김규평의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이분법적으로라도 그를 옹호하는 것인가? 비난하는 것인가? 모호하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영화는 김규평의 '불안'이라는 정서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톤, 매너, 장르는 그 정서를 담기에 적합한 그릇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담담함이라는 차가운 그릇과 불안이라는 뜨거운 정서가 만나 제3의 의미를 유발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창작진이 현대사의 실제 사건이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다룬다는 중압감을 내려놓고 좀 더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이 포착한 것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고유한 시선을 발견하고 적합한 형식에 담아내는 작업은 외롭고 고된 일이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자기 자신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임자 옆에는 아무도 없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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