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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Aug 30. 2021

<아이>

검열의 불편함, 일상의 편안함

*이 글에는 영화 <작가 미상>(2018), <아이>(2021)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일 출신 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영화  쿠르트 바르너트) 일생을 그린 영화 <작가 미상>(2018)  장면은 어린 시절 쿠르트(카이 코흐르스) 이모(자스키아 로젠달)와 함께 <퇴폐미술전> 관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퇴폐미술전> 독일의 나치 정권이 기획한 <위대한 독일미술전> 짝을 이루는 전시로서, 전자에는 나치가 생각하기에 비판받아 마땅한 작품들로 피카소, 뭉크, 샤갈, 칸딘스키, 클레 등의 작품들을, 후자에는 "‘다수의 건강한 대중이 즐거워하는’ ‘건전한 본능’"¹ 가진 작품들을 모아 놨다. 정신병자로 결국 격리되어 불임수술을 받고  그대로 '소각'되는 이모는  퇴폐미술들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쿠르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 전시와 관련된 안소현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치스의 <퇴폐미술전>은 스스로가 '퇴폐미술'이라고 규정한 작품들을 모독하기 위해 현대미술의 관례에 어긋나는 전시 방식을 택했다. 수많은 액자들을 적절한 간격 없이 여러 줄로 다닥다닥 붙여 걸거나, 그냥 바닥에 세워 두거나, 작품 위에 비난의 문구를 붙이는 식이었다. 나치스는 전시 공간과 비평 언어를 최대한 활용해,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이 왜 불온한지 대중에게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²

<퇴폐미술전>을 안내하는 직원(라스 아이딩거)과 어린 쿠르트 바르너트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검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먼 과거 일제, 혹은 독재 정권 때 예술이나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자행되었던 일, 가깝게는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통해 ‘불편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던 일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검열이 과거의 일이자 이제는 객관적으로 그 검열 주체의 잘못과 검열 행위 자체의 오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 기관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대중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검열하고 삭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장애인 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작업 중 만난 장애인 ‘동료’는 있을지 모르지만 ‘친구’가 있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저 질문에 ‘장애인’ 대신 무언가를 대입했을 때 답할 수 없다면, 나를 포함한 이 사회는 그 대상을 검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난민 친구가 있습니까?' 난민의 86%는 가난한 개도국으로 보내지고,³ 그나마 한국을 찾은 난민 신청자의 98%가 탈락하는 이 사회⁴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수자 친구가 있습니까?' '미혼모 친구가 있습니까?'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친구가 있습니까?'


 영화 <아이>(김현탁, 2021)는 보육원 출신 아영(김향기)과 미혼모 영채(류현경)의 연대를 그려낸 영화다. 아영은 아동학 전공생으로 친구들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그리고 보호 종료 아동들이다. 보호 종료 아동들은 보육 시설에서 생활하다가 만 18세가 되어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야 하는 청소년들이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친구가 있습니까?'에 대한 답으로 아영은 '그런 친구들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미혼모 영채는 룸살롱에서 일하며 남편 없이 6개월 밖에 안 된 혁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아영은 수급자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보수를 조정하고 현금으로 받고 싶지만 사장은 이를 거부한다. 이렇게 일자리를 잃은 아영에게 보육원을 나온 후로 갖은 사고를 치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친구 경수(김현목)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한다. 아동학 전공생이니 잘할 거라며 베이비시터 일을 찾아준 것이다. 그렇게 아영은 영채와 혁이를 만난다.

혁이를 안고 있는 아영과 그를 바라보는 영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새벽까지 룸살롱에서 일하는 영채 대신 아영은 혁이를 돌보며 혁이와 유대가 생긴다. 베이비시터는 사실 ‘가짜’ 엄마지만, 엄마와의 유대가 형성되는 특정 시기에 아이는 그를 ‘진짜’ 엄마처럼 여기게 된다고 한다. 아영과 혁이가 그런 상황이다. 여러 일들을 겪으며 영채와 아영이 서서히 가까워지던 하루, 영채가 밤에 혁이를 안아보고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침대의 안전장치를 잘못 건드려 혁이가 떨어지는 사고가 난다.

 영채는 이를 아영의 책임으로 몰고, 이 때문에 아영은 더 이상 혁이를 돌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영채는 홀로 혁이를 돌보며 살아가지만 혁이의 병원비를 포함해 감당할 수 없는 돈이 쌓여만 간다. 아직 모유가 나오기 때문에 ‘2차’를 나갈 수도 없는 몸이라 룸살롱의 수입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영채는 네일아트 학원을 다니며 새로운 일자리를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결국 영채는 돈을 받고 혁이를 불법 입양 보내기로 한다.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나, 홀로 아이를 키워가는 자신에게나 좋은 선택이라고 믿으며.

 그러한 혁이를 되찾아오는 사람 다름 아닌 아영이다. 부모 없이 자라난 자신의 경험, 그리고 친구 경수의 죽음이 계기다. 경수가 갑작스레 죽고, 경찰은 경수 집의 우울증 약들을 근거로 자살이라 결론 내린다. 경수의 보호 기간은 이미 종료된 상태고, 보육원의 친구들은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어 연고가 전혀 없는 경수의 부검도 장례도 치를  없다. 그들은 그저 ‘이기 때문이다.

 혁이가 만약 파양 되고 보육원에 보내지면 그런 삶을 똑같이 겪게 될 생각에 아영은 불법 입양 중개인의 집에서 혁이를 되찾아 영채가 일하던 룸살롱으로 향한다. 룸살롱 사장 미자(엄혜란)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영채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음에도 달려와 화를 내며 혁이를 다시 데려다 놓으라 하지만, 이내 혁이를 받아 안고 한참 운다. 미자는 이유식인지 죽 인지 모를 무언가를 끓여와 함께 나눠먹고, 셋은 룸살롱에서 혁이가 좋아하는 동요를 부른다. 영화는 다리를 다친 채영과 그 대신 혁이를 안은 아영이 영화 중 가장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유흥가의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며 끝난다.

새로운 삶을 향에 한 걸음을 내딛는 아영, 혁이, 영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흔히들 예술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작업이라고들 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이미 있는 여러 것들  무언가를 선택해서 배치하는 것이 주된 일이라 생각한다. 분명 바로  지점 때문에 예술은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예술은 선택과 배치라는 점에서 스크린, 무대, 화폭, 전시장  어떤 ‘없는공간에 무언가를 ‘있게하는 동시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게만들 수도 있는 작업이다.

 여기서 무언가를 ‘없게만드는 요인은 상당히 많다. 국가의 검열일 수도, 예술가의 자체 검열일 수도, 대중의 검열일 수도 있다. 앞서 던진 질문을 다시 상업영화계에 던져보자. 장애인 배역 혹은 배우가 등장하는가? 난민이 등장하는가? 성소수자가 등장하는가? 미혼모가 등장하는가?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는가? 혹은 등장을 넘어서 그들이 서사의 주된 인물인가? 그렇다고 답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것이 상업영화의 자체 검열인 것이며,  사회에는 분명 '있지만' 상업영화가 ‘없게만드는 사람들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엘리슨 벡델은 ‘여성’ 역시 서사를 가진 예술의 자체 검열 대상으로 보고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2명이 나오는가?”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가?” “그 이야기는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인가?” <아이>는 세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기존 상업영화에서 배제되던 여성을 충분히 다룰 뿐만 아니라 룸살롱에서 일하는 미혼모, 보육원 출신 등 기존 영화들에서 다루지 않던 인물들을 서사에 중심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없다’고 여겨진 이들을 ‘있게’한 영화다.

룸살롱에서 혁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미자, 영채, 아영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화의 스타일이 그러한 새로운 서사와 인물만큼이나 신선하다고  수는 없다. 이미 주인공 아영 역을 대중에게  알려진 김향기 배우가 맡았다는 점만 봐도 짐작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때문에 잘 다뤄지지 않던 서사와 인물을 다루면서도  조금  과감한 캐스팅과 새로운 영화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았는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끝까지 ‘상업영화 톤이 유지되는 것을 보며, 어쩌면 김현탁 감독은 상업영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없다 여겨져  인물들을 ‘있게만들고 싶었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있는지, 예술 작품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들여다보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검열이라는 것은 꼭 악당처럼 그려지는 독재 정권이나 정치인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느끼는 그 불편함은 과연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배제하고, 그리고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감으로써 편안함을 누리고 있는가?


¹ 안소현, 「'예술에 대한 폭력'과 '폭력을 흉내 내는 예술' - <퇴폐미술전>의 반복과 '미러링'」, 『원본 없는 판타지』, 후마니타스, 2020, p.363

² 위의 , p.365

³ 박은하 기자, "난민 86% 개도국으로... 가난한 나라들이 난민  받아들인다", 경향신문, 2021. 8. 26.

⁴ 이두리, 문광호 기자, "4명이 9287건 심사… 수개월 희망고문 당하다 결국 ‘불인정’", 경향신문,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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