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보는옆집개 Aug 26. 2021

<자산어보>

교차하는 두 선이 그려낸 짙푸른 세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종류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는 말이 있다. 특정 '장르'로 여러 영화들을 한데 묶어 말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그 영화를 만들었느냐에 따라 같은 장르, 심지어 같은 대본일지라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저 말이 그저 이상에 가깝다 생각될 정도로 서로 유사하다. 마치 공식처럼 전개의 초반에는 관객의 긴장을 풀어줄 모양인지 코믹 씬이, 다음에는 리듬을 만들기 위한 화려한 액션 씬이, 이어서 위기를 극복하고 잠시 찾아온 평화를 깨는 반전이, 마지막에는 울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씬이 자리한다. 이 정도면 정말 언젠가는 AI가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 싶다.

 반면 어떤 영화들은 앞서 언급한 저 말에 힘을 실어준다. 꼭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예술영화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어법을 따르는 동시에 화려함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영화를 끝까지 몰입해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들이 있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가 그런 영화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섬으로 유배되어 지금껏 보지 못한 주변부를 들여다보게 된 한 인물과, 세상에 나아가고 싶은 변두리의 한 인물이 그려내는 단순하지만 힘 있는 드라마를 담은 <자산어보>는 단순히 '사극' 혹은 '시대극'이라는 테두리에 넣기에는 그 장르의 이름이 담아내지 못할 섬세함이 가득하다.  


 <자산어보>는 정조 때 중용되어 나라의 큰 일을 두루 맡아 해내던 정약전(설경구)과, 그가 <자산어보>를 쓰는데 도움을 준 흑산도의 청년 창대(변요한)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약전, 약종, 약용 세 형제는 모두 천재라 불리는 시대의 인재였으며, 정조가 크게 사랑한 신하였다. 문제는 세 형제가 모두 당시 사악한 서양의 학문이라 여겨지던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고위직인 데다 당대 천주교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황사영, 이승훈 등과 가족 관계로 맺어진, 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아끼던 정조가 승하한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 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정 씨 형제들을 시기하던 신하들과 정순 대비는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며 그들을 몰아낸다. 이 과정에서 정약종은 참수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귀양 보내진다. 나주까지 함께 가던 두 형제는 결국 헤어지게 되는데, 정약용은 땅끝 강진으로, 더 위험한 인물이라 여겨진 정약전은 그보다도 더 먼바다의 흑산도로 보내진다.

사학 죄인이자 역적으로 몰린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정약전은 남편을 잃고 시댁에서 남겨준  딸린 넓은 집에 홀로 사는 가거댁(이정은)네서 머물게 되는데, 바다와 하늘만 있는 흑산도에는 사람보다 물고기가  많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홍어 생물을 먹어보는  지금까지 육지, 그것도 수도 한양에서는 보지 못한 수많은 '진짜 살아있는' 생선들을 접하게 된다. 이에 흥미를 느낀 정약전은 바닷가를 거닐다가 동네 청년 창대를 만나게 된다. 창대는 첩의 자식으로 양반도 상놈도 아니다. 그는 벼슬길에 오를 수도 없으면서 홀로 구한   되는 책으로 공부를 하며 낚시에 몰두해왔다.

 사실 공부에 목이 마른 창대에게 고위 관리 정약전의 유배는 그 갈증을 해소해 줄 큰 기회다. 하지만 사학을 따르는 역적이라는 점 때문에 창대는 정약전에게 배우기를 거부한다. 그러던 하루 취기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정약전을 창대가 구해주고, 돈 주고 벼슬을 산 마을 별장(조우진)에게 부당한 세금에 대해 항의하다 옥에 갇힌 창대를 정약전이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가깝게 된다. 정약전은 사례를 하러 생선을 가지고 온 창대와 대화를 하던 중, 어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창대로부터 자신이 할 일을 찾는다.  

 여기부터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창대는 정약전에게 마음을 열고 그에게 공부를 배우며, 정약전은 창대로부터 어류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정약전의 이러한 선택은 동생 정약용이 선택한 길과도 다르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의 길을 논하는 책들을 쓰고 있었다. 반면 정약전은 양반이 천하다 하여 가까이하지도 않던 생선을 손수 만지고 해부해가며 <자산어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정약전을 위해 커다란 돔을 잡아온 창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창대는 이런 정약전을  따르면서도 성에 차지 않아 한다. 그의 마음은 공부에 정진해 '진짜 양반' 되어 벼슬을 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소위 정도와 출세의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전은 <자산어보> 더불어 표류 중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을 두루 거친 어부 문순득의 여행기 <표해시말> 쓰는  그런 일에는  이상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에 창대는 정약전을 떠나 육지로  자신을 낳은 양반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아직은 공부가 한참 부족한 창대는 문전박대당한다.

 창대는 흑산도로 돌아와 정약전에 밑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갈수록 실력이 는다. 이러한 창대의 변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들도 정약전이 가르쳐주길 바라며 그의 거처로 몰려오는데, 이에 정약전은 창대로 하여금 아이들을 가르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창대는 마을의 오랜 친구였던 복례와 결혼을 하고, 가거댁은 정약전의 아이를 가진다.

 한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는 창대의 소문을 들은 창대의 아버지 장진사(김의성)는 흑산도로 찾아온다. 창대는 흔들린다. 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벼슬길을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반면 정약전은 창대가 자신과 함께 우이도로 옮겨 함께 <자산어보>를 쓰게 하고 싶다. 아니, 참된 진리와는 벗어나 백성의 위에 군림해 먹고사는 그릇된 '가짜 관리'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다.

흑산의 바다를 거니는 창대와 정약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창대는 결심하고 흑산도를 떠나 과거에 응시하지만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진사에 머무른다. 이미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자신 가문의 사람들을 대과에 합격시키던 당시 창대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진사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연을 통해 겨우 관직에 나아간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서 본 것은 정약전이 경계했던 그릇된 관리들의 삶이었다. 임금의 품에 들어가 백성을 위하고 싶던 창대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러한 악습들을 바꾸려 오랜 시간 갖은 노력을 하는 창대가 하찮아 보일 정도로 세상은 이미 한참 잘못되어 있었다. 급기야 창대는 갓난아이의 군포를 강요받다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한 백성의 모습을 보고 흥분해 관리를 죽일 뻔한다. 이를 계기로 창대는 육지를 떠나 다시 흑산도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창대는 우이도에 들러 정약전을 찾지만 이미 그는 글을 쓰다 세상을 등졌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남긴 글에서 그의 솔직한 마음을 밝힌다. 자신은 머나먼 섬 흑산이 두려웠다. 유배를 떠나며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그 두려워 음험하고 죽은 검은색 '흑산'이 창대를 만나며 그윽하고 살아있는 검은색 '자산'이 된다. 흑산, 아니 자산에서의 흙탕물 묻은 삶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스승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창대에 눈에 흑산도는 더 이상 흑백이 아니라 짙푸르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창대의 눈에 담긴 흑산도만 유일하게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어 표현되는데, 이때의 컬러 역시 차분하고 깊이 있는 섬과 바다의 색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흑(黑)과 자(玆)는 모두 검은색을 뜻하지만, 정약전에게 전자는 세상을 뒤로한 상태에서 바라본 암울하고 음침한 검정이라면, 후자는 그 안에 생명이 가득하고 사람의 삶이 가득한 깊고 짙푸른 검정이다. 창대에 눈에 비친 흑산 역시 탈피하고 싶은 음침한 곳이었다가 스승의 뜻에 다다르자 새롭게 자산으로 비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다. 세상의 중심은 한양과 임금이고, 각 고을과 백성은 그것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라 믿었던(그래서 필연적으로 열등한 '가짜'라 믿었던) 시대에 그 세상 한가운데에 서있던 자와 변두리에 서 있던 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산어보>는 그 중심에서 세상에 실망하고 변두리에 눈을 돌린 정약전과,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다 스승의 뜻을 따라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창대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축은 단순하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다 중간에 서로 교차하고, 그 방향대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다 스승이 기다리는 자리로 제자는 돌아온다. 이 단순한 축을 그려내는 방식 역시 과하지 않다. 가장 큰 스펙터클이 거친 파도와 섬을 담아낸 전경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힘이 있다. 그 전경조차 감정을 담아낸다. 많은 요소들을 덜어내더라도 이야기의 축이 뚜렷하고, 각자의 인물들이 지향하는 바가 명확하며, 그 지향점이 서로 얽히며 변화하는 동력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흑백이었다가 컬러가 되는 영화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갈수록 영화를 만드는 기술들은 발전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수많은 자본이 필요했던 기술들이 이제는 흔해졌으며, 화려하게 '잘' 찍어낸 영화들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기본이 되는 이야기에서 오는 기승전결보다는 이야기 외적인 요소에서 그 힘을 찾으려는 영화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한 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흑산이 자산이 되는 이야기,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야기적 힘에 집중한 흑백 영화 <자산어보>야 말로 화려한 컬러와 기술로 치장한 영화들보다 더 강렬하게 빛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