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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Aug 11. 2021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8월 2일 경향신문에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이슬아)라는 글이 실렸다. 제목이 눈길을 끌어 읽어보니 해당 문장은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라는 <절멸>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었다. <절멸>은 동물권 보호를 위해 여러 작가들이 모여 쓴 글로, ‘의인화’가 아닌 ‘의동물화’를 통해 쓴 책이다. 앞의 문장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박쥐의 입장’에서 쓰인 문장이다. 또한 오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20년을 살 수 있습니다. 20년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애정을 알고 포옹을 좋아합니다.’라고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8월 11일 자 한겨레 기사 "발전 공기업 5개사, 비정규직 빼고 정규직만 '백신 우선접종'"(신다은 기자)은 위의 문장을 곧바로 연상케 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함에도 불구하고 "국내 발전 공기업 5개사(한국남동발전·한국 서부발전·한국동서발전·한국 남부발전·한국 중부발전)는 지난달 ‘코로나19 백신 우선접종을 위해 전력수급상황 담당자의 명단을 파악해 달라’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공문에 회신하면서 정규직 직원 명단만 포함하고 비정규직 직원은 제외"한 것이다. 암울하지만 분명 이 사회는 누군가를 '죽인 힘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하청 업체로 밀려난 정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나는 남을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영화다. 정은(유다인)은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했던 전기 관련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고 연고 없는 먼 바닷가 마을로 떠난다. 하청 업체 사무실에는 송전탑에 올라 노동을 하는 작업복 차림의 남성들 뿐이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해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 건물에 유일한 정장 차림의 여성 정은이 들어선 것이다. 현장 소장은 "공부 잘해서 본사 들어 간 양반"이 왜 이런 물가 싸고 사람 몸값 싼 곳에 왔냐며 이곳에는 정은의 자리가 없다고 한다. 명목상 하청 회사로의 1년 파견이지만 그것은 곧 회사의 자진 퇴사 강요인 것이다.

 하청업체로 밀려나기 전 본사 탕비실 한편으로 먼저 밀려난 정은의 책상. 하청업체 사무실 한편에 임시로 마련된 정은의 책상은 이를 연상시킨다. 또한 남성들뿐인 그곳에 탈의 공간이 새롭게 마련되며 기존 직원들과 정은 사이에는 또다시 벽이 쳐진다. 정은에게 할 일이라고 주어진 것은 다른 이들이 먹다 남은 쓰레기나 치우는 것이다. 하지만 정은은 버틴다. 책을 펼쳐 현장의 업무를 익히고, 정장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며 악착같이 버틴다.

정은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동료 '막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그런 정은과 유일하게 가까워지는 것은 '막내'(오정세)다. 송전탑 업무 외에도 편의점 알바에 대리운전까지 하며 아이를 키우는 그는, 매번 팩소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르는 정은과 유일하게 '동료'로서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 '막내'지만 현장 업무에 미숙한 정은에게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쳐 주면서 인간적인 유대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장 소장은 정은에게 업무 평가 'D'등급을 매겨 어떻게든 정은이 회사를 그만두게 하려 한다.

 무엇보다 정은은 높은 송전탑에 오르지조차 못한다. 정은은 애초에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여러 스트레스 요인들이 겹치며 송전탑이라는 '특정 대상물'이 공포를 유발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정은은 두 가지 싸움을 해나간다. 우선 정은은 어떻게든 공포를 이겨내고 송전탑에 오르려 한다. '막내'와 함께 다니며 조금씩이라도 더 올라가 보려 한다. 또 하나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업무 평가 등급을 낮게 매긴 소장을 상대로 고용노동부에 부당노동행위로 신고 및 고발까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에 돌아오는 것은 본사에서 파견된 인력들이 직접 업무 능력을 심사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정은을 그만두게 하려는 회사에 맞서 정은은 약까지 먹어가며 평가에 임하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다. 심사에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현실적으로 회사와의 싸움이 어렵다는 생각에 좌절하는 정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막내'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그이지만 정은을 위해 쉬는 날 교육용 송전탑에서 '함께' 송전탑에 오른다. '막내'는 송전탑을 자신이 지켜야 할 딸들이라 생각하며 오른다고 한다. 정은은 처음으로 송전탑 꼭대기에 오른다. 그는 누구를 위해 송전탑을 오를 수 있었을까. 하나 확실한 것은 '함께' 올라가 준 이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막내'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송전탑에 오른 정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그 길을 '함께' 해준 '막내'는 작업 중 죽는다. 두 번 죽는다. 송전선에 감전되어서,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져서. 그것도 정은이 보는 앞에서. '막내'의 시신을 안치한 장례식장에는 조문객이 아니라 본사 직원들이 나와있다. 어떤 서류에 서명하면 보상금이 나올 것이라며 직원들은 '막내'의 어린 딸을 설득하고 있다. 작업 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떤 사유로 그가 죽었는지를 밝히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죽음을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회사의 노력에 정은은 맞서지만 소용이 없다.

 이때 일대 지역의 전기가 모두 나간다. 영세한 장례식장에는 임시 발전기도 없다. 이대로면 '막내'는 죽어서도 다시 죽는다. 아니, 썩는다. 정은은 송전탑으로 향하지만 회사는 급할 것 없다며 대기하라고 한다. 우선 인구가 많은 지역부터 복구하고, 작은 섬들로 이뤄져 인구가 적은 지역은 후에 처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은은 섬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냐며 홀로 송전탑에 올라간다.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은은 전선을 수리해 복구하고, '막내'가 잠들어 있는 장례식장이 있는 작은 마을들에 불이 들어온다. 정은은 높은 철탑 위에서 이를 묵묵히 바라본다.


 영화적으로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좋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해고 위기에 놓인 노동자와 그와 연대하는 노동자는 '선'으로, 그를 자르려 하는 회사와 방관하는 다른 노동자들은 '악'으로 그려낸 이분법이 이 이야기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 그 안의 인물이 자신의 신념과 벗어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딜레마를 그려내기보다는 '선'으로 비치는 정은이 '악'과 맞서 버티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정확히는 이 영화 속 정은의 싸움은 기억에 남는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치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지만 사실 그 톱니바퀴는 섬세하지 못하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설 자리는 없다. 그들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을 사실상 ‘죽인 힘으로’ 이 사회는 돌아가고 있다. 정은은 이러한 사회에 맞서 잠시나마 그 톱니바퀴를 멈추고 전기에 불타버린, 떨어져 버린, 사라져 버린 '막내'를 바라볼 것을 외친 것이다.

 <절멸>에서 오리의 입을 빌린 화자는 ‘20년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한다. 직장인들은 20년 정도 일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 한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더라도 다른 회사로, 다른 회사에서 회사 밖으로 옮겨가며 일한다. 힘든 것은 이 옮겨가는 과정이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더 잘 살게 하기 위해, 회사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쫓겨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친구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을 다른 이의 생존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기사로 돌아와 보자. 나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본다. 해당 기사는 사실 ‘동물권’에 관한 기사였다. 나는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육식을 즐긴다. 탄소배출부터 시작해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가축 사육과 도살 및 유통에 대한 정보들을 여기저기서 접하지만 보기 불편해서 외면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동물권에 대한 저 문장은 내 경계선 근처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를 죽이지 않으려 하고 있고, 누구를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참고기사

이슬아, "죽인 힘으로 살지 않겠다", 경향신문, 2021. 8. 2.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8020300115)
신다은, "발전 공기업 5개사, 비정규직 빼고 정규직만 '백신 우선접종'", 한겨레, 2021. 8. 11.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07203.html#csidxcfdc23168a2a8d2873227f21f5231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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