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코미디, 장르와 이야기 사이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 10월 1일 서울 잠실구장, 두산과 NC의 시즌 마지막 경기. 9회 말 1사 2루 5:5 동점 상황. NC는 필승의 구원투수 원종현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고 2루에는 두산의 발 빠른 대주자 김대한이, 타석에는 포수 박세혁이 섰다. 박세혁은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초구를 휘둘렀고 이 공은 2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가르며 두산의 극적인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다. 1위 SK와 9경기 차까지 벌어졌던 두산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역전 끝내기로 승리를 거두며 그야말로 극적인 미러클이 일어난 것이다.
팬심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핵심은 '사건'이다. 영화의 장르나 감독의 성향에 따라 그려지는 방식은 차이가 있겠지만 사건의 본질은 '변화'다. 외계인이 침공하든 직장에서 해고당하든 간에 그러한 일이 '이야기적 사건'이 되려면 그 사건을 겪은 인물에게 어떤 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하고 자극적인 일이어도 그 일을 겪은 등장인물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은 사건이라 할 수 없다.
로버트 맥키는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 이승민 역, 민음사, 2015)에서 "이야기적 사건은 등장인물의 삶의 조건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며 이 변화는 가치의 변화라는 형태로 경험되고 표현된다."(p.59)라고 밝힌다. 이때 '가치'는 윤리적 가치, 경제적 가치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죽음, 사랑/미움, 자유/속박, 진실/거짓, 용기/비열, 충성/배반, 지혜/어리석음, 강함/약함, 흥분/지루함 등 "서로 언제든지 대립항으로 옮아갈 수 있는 양면적 성격을 가진 경험"을 통틀어 이야기적 가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p.60) 특히 이러한 가치의 변화가 "갈등으로부터 촉발된 변화"(p.61) 일 때 그것을 비로소 '이야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야구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극적'이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다. 대학시절 연극이나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해 수강했던 수업에서 “등장인물이 목표를 추구하다 갈등을 일으킬 때 그것을 '극적'이라 한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저 게임이 '극적'이었던 이유는 우승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추구하던 두 팀이 치열한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화 <정직한 후보>는 선거를 앞둔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 분)이 당선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다 그것을 방해하는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거짓'이라는 가치로부터 '진실'이라는 가치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3선 국회의원 주상숙은 베테랑 정치인답게 이미지를 구축하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사는 곳부터 시작해 심지어 지난 선거 때 동정표를 얻기 적절한 타이밍에 죽었다고 알려진 할머니 김옥희 여사(나문희 분)까지 실제로는 살아있을 정도니 그에게 거짓은 도구가 아니라 삶 자체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선거 유세를 잘해나가던 어느 날, 남들 몰래 할머니를 방문하고 귀가하던 주상숙은 장대 같은 비를 피해 할머니 집 뒷산에 잠시 머무른다.
빗속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 쌓인 돌탑을 발견한 주상숙은 돌탑 앞에서, 김옥희 여사는 손녀가 떠나고 홀로 남은 집 안에서 동시에 다른 소원을 빈다. 주상숙은 자신이 전국구 스타 정치인이 되기를, 김옥희는 손녀가 진실된 삶을 살기를. 그때 번개가 치고 두 사람의 소원이 동시에 이뤄진다. 주상숙은 더 이상 그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만 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이 때문에 상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골 때리는'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는 진실의 입을 가지게 된 라미란이 그 쉬운 접대성 멘트조차 하지 못하게 되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보여준다. 남편이 시어머니 소식을 전하자 '망할 놈의 할망구'라고 하지를 않나,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평소 메뉴판마저 보좌관들이 읽어주며 글자는 하나도 안 읽는다고 하지를 않나, 자서전 관련 기자회견에서 책 사재기에 대필까지 모두 셀프 폭로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대형사고, 지지율도 폭락이다.
문제가 자신의 '입'에 있음을 깨달은 주상숙은 이를 고치기 위해 의학과 미신을 동원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때 보좌관 박희철(김무열 분)은 사태를 수습할 다른 방법을 떠올린다. 그 입을 고칠 수 없다면 이 상황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선장, 선거 전략의 전설적 인물 이운학(송영창 분)을 영입하는 것이다. 이운학은 그 '진실의 입'을 무기로 삼아 캐치프레이즈를 '정직한 후보'로 변경한다. 이 전략이 먹혀들어가며 주상숙의 지지율은 다시 가파르게 상승한다. 심지어 군 복무 기피를 위한 아들의 이중국적 문제 마저 사실은 그 아들이 혼외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상숙이 친아들보다 더 잘 키워왔다는 점이 밝혀지며 플러스 요인이 된다.
잘 정리되는 듯한 주상숙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할머니 김옥희 여사다. 정확히 말하면 김옥희 여사가 궂은일을 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출연해 만든 '옥희재단'이야말로 주상숙 거짓말의 끝판이었다. 지난 선거에서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옥희재단'과 '옥희과학대'를 설립했던 주상숙.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기존의 취지와는 다르게 옥희과학대에서는 기부금을 내고 입학한 부자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가난한 학생들은 나쁜 성적을 받으며 장학금을 환수당하고 있었다.
김준영 기자(온주완 분)는 주상숙의 거짓된 삶을 추적하기 위해 뒤를 캐고 다니다가 옥희과학대의 이러한 실태를 알게 되고 이를 온라인에 폭로한다. 중요한 것은 이운학이 김옥희 여사의 생존을 목격했고 당대표 김상표(손종학 분)에게도 이를 알렸다는 것. 이운학은 자신이 덮어줄 수 없는 거짓말까지 일삼아온 주상숙을 버리고 김상표와 함께 상대 진영인 남용성 후보(조한철 분)에게로 떠난다. 주상숙 선거운동에 최대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주상숙을 변화시키는 사건은 바로 김옥희 여사의 실제 죽음이다. 김옥희 여사는 죽은 사람으로 처리된 이후 보좌관 박희철의 할머니로 살아왔으니 상주 역시 주상숙이 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상숙의 진짜 할머니 장례식은 박희철 보좌관의 가짜 할머니 장례식이 된다. 이때 시신까지 들춰보려 하며 할머니가 죽었다던 주상숙의 거짓말을 폭로하려는 김상표, 남용성 일당과 대치하던 주상숙은 사퇴를 약속하며 사태를 일단락시킨다.
보좌관 박희철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폭로 전문 기자로부터 주상숙, 김상표 대표, 남용성 후보 간의 선거 밀어주기와 주식 투기 정보 거래가 녹화된 몰래카메라 원본 파일을 손에 넣는다. 박희철은 그 파일이 담긴 USB를 주상숙에게 전달하고, 옥희과학대 내 김상표 대표가 몰래 만들어놓은 아지트로 주상숙을 데리고 간다. 등잔 밑이 어두우니 가장 안전하다는 판단이다.
그 아지트에서 옥희과학대의 온갖 비리가 사실은 당대표 김상표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상숙은, 옥희과학대에서 비리를 지적하려다 장학금 반납을 요구받고 자살 시도해 반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학생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학교에서 농성 중인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하는 주상숙. 하지만 USB를 주상숙이 입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운학이 추격해온다. 추격을 가까스로 피해 택시를 잡은 주상숙은 갈 곳이 없다. 자신이 만든 거짓 세상 속에는 안전한 곳이 없는 것이다.
이에 주상숙은 김준영 기자를 찾아가 USB를 건넨다. 자신의 비리 내용도 담긴 자료를 쿨하게 건넨 주상숙은 다음날 선거 당일 사퇴 기자회견을 연다. 이때 기자들이 몰려온다. 그 자료는 주상숙과 관련된 자료가 아니라 수많은 정치인들의 동물 같은 추태가 담긴 자료였던 것이다. 기자가 주상숙의 Joo와 동물원의 Zoo를 착각하고 자료를 잘못 넘겨줬던 것. 이후 주상숙은 옥희재단 비리 등 자신이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건들과 관련된 검찰 조사에 응하며 징역도 산다. 석방된 후 주상숙에게 남은 것은 가족 말고는 없다. 거짓으로 쌓은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진짜 청렴하고 '정직한 후보'가 된 주상숙이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다. 나는 코미디를 극장에 가서 보는 편이 아니다. 여유가 생겨 평소에 놀던 대로 실컷 놀아도 여전히 시간이 남아 정말 할 게 없을 때 킬링타임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코미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가 만듦새까지 좋고 메시지까지 던져준다면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정직한 후보>의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성립한다. 초두에 로버트 맥키를 인용하며 이야기적 사건을 '갈등으로부터 촉발된 가치의 변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주상숙이 영화 초반에 지니는 가치는 '거짓'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거짓말을 못하게 된 후 갈등을 유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진실'이라는 가치로 변화한다. 따라서 주상숙의 이야기는 영화적 이야기로서 성립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리듬'과 '템포'의 측면에서도 만듦새가 있다. 리듬의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의한 음의 장단, 강약 따위의 흐름."(다음 국어사전)이며, 템포의 사전적 정의는"악곡을 연주하는 속도, 영화나 소설 따위에서 줄거리나 내용의 진전 속도."(다음 국어사전)이다. 음악에서 어떤 리듬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힙합이 되기도 하고 왈츠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 역시 리듬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음악의 리듬을 결정하는 것이 마디 내 음표의 구성이라면 영화의 리듬은 비트, 장면, 시퀀스, 장의 구성으로 결정된다. 로버트 맥키에 따르면 비트는 "행동/반응이라는 행위의 교환"(p.65)으로 장면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장면들이 모여 시퀀스를, 시퀀스가 모여 장을 구성한다. 이 구성을 어떤 모양으로 했느냐에 따라 그 영화가 가지는 고유한 리듬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같은 곡도 어떤 속도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되는 것처럼 영화 역시 같은 구성이어도 어떤 템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영화에서 리듬과 템포는 음악에서 만큼이나 정말 중요하다. 인쇄된 출판물들은 독자가 읽고 싶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러닝타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감독이 사건의 전개 리듬과 템포를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직한 후보>의 리듬과 템포는 코미디에 걸맞게 잘 설계되어 있다. 영화는 100분이라는 적당한 길이의 러닝타임을 정확히 5 등분하여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0-20분: 정치인 주상숙의 거짓된 삶
2. 20-40분: 거짓말을 못하게 된 주상숙의 해프닝
3. 40-60분: 해결사 이운학의 등장과 문제 해결
4. 60-80분: 진짜 문제인 옥희재단 비리와 김옥희 여사의 생존이 드러남
5. 80-100분: 김옥희 여사의 죽음과 사퇴를 결심한 주상숙이 새 사람이 되는 과정
문제는 리듬과 템포의 만듦새가 여러 번 타본 롤러코스터처럼 정직하고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저 정도면 충분하다. 코미디여서가 아니다. 위대한 이야기들도 그 골격은 주상숙의 이야기만큼이나 심플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거짓과 진실은 많은 이들이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본 경험이 있는 보편적 가치라는 점에서 주상숙의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중요한 지점은 그 심플한 이야기를 어떤 리듬과 템포로 풀어가며 코미디라는 장르에 걸맞게 관객을 즐겁게 해 줄 것이냐는 것이다.
'정확히' 1/5 지점에서 주상숙은 거짓말을 못하게 되고, '정확히' 2/5 지점에서 이운학이 등장하고, '정확히' 3/5 지점에서 옥희재단과 김옥희 여사의 문제가 드러나고....... 극장에서 봤다면 몰랐을 수도 있었지만 넷플릭스로 이 영화를 보던 나는 익숙한 리듬감에 혹시나 하고 전개 시간을 체크해 봤더니 저런 구성이었다. 이런 정확하고 솔직한 구성은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360도 회전을 할 타이밍에 정확히 해 주고, 급강하를 할 지점에 정확히 해주는 롤러코스터라니.
또한 선거와 정치라는 소재는 리듬과 템포 구성에 용이한 반면 자주 사용되는 소재라는 점에서 양날의 칼과 같다. 선거 운동에 자주 사용되는 음악과 춤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리듬과 템포를 내재하고 있어 잘 사용만 한다면 감독이 원하는 리듬과 템포를 즉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또한 비리의 발견과 폭로, 이를 막으려는 세력과의 격투와 추격 장면은 그 장면 자체로 가지고 있는 운동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그 요소들을 공식처럼 상투적으로 사용할 때 그 에너지는 반감되며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만약 이 영화가 '코미디'라는 장르를 조금 내려놨다면 어떨까? 장르적으로 정확하고 완성도 있는 구성은 때로 그 장르의 색깔만을 강조하게 되어 이야기가 가진 힘을 가리기도 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주상숙이라는 인물의 변화와 그의 내면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상숙을 들여다볼만하면 장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액션 등의 리듬/템포 유발 요소들이 시작되며 몰입을 어렵게 했다.
데뷔하고 앨범을 3-4개쯤 낸 밴드들의 신작을 들어보면 음악적 완성도는 높아졌을지 몰라도 오히려 데뷔 앨범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겁도 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만든 그 앨범. 거칠고 완성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거기에서 보석 같은 지점들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와 원석의 반짝임이 상충하는 그 시기를 넘어서야 비로소 그 밴드는 위대한 명반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정직한 후보>는 제목만큼이나 완성도 높은 '정직한' 구성이 오히려 아쉬움을 남긴다. 주상숙 정도의 이야기를 발견했다면 거침없이 휘둘러도 좋겠다. 망설이지 않고 초구에 곧바로 방망이를 휘둘렀던 박세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