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리뷰] 일인칭 가난 - 안온

가난했던 우리, 상처받은 우리, 우리를 알아본 우리

by 혜영

97년생 안온작가님이 쓴 <일인칭 가난>을 읽었다. 20여 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던 작가님 본인이 경험한 ‘가난’을 상세하게 담은 책이다. 빈곤가정 아이들 8명을 인터뷰한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아주 잘 읽었지만 인터뷰집이다보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겨있음에도 한명 한명이 가진 사연의 깊이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일인칭 가난>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의 아이들 중 한명의 목소리를 비로소 상세하게 듣게 해준 책으로 느껴졌다. 150p가 조금 넘는 얇은 책임에도 이 책이 가진 묵직함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내가 10대, 20대 시절 겪은 가난과 작가님의 가난이 비슷해 공감도 많이했고.

작가님과 내가 겪은 가난은 비슷하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했다. 작가님의 말대로 가난의 양태는 가지각색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살아오면서 이정도로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해서 그런지 작가님의 고통과 슬픔이 이해가 되고 10대, 20대시절 내 마음은 어땠나 새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이자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몸이 불편해 풀타임 근무가 어려워 단시간 근로만을 전전하며 경제활동을 해야했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작가님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부산의 한 주공아파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돈이 부족한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고단한데 술에 취해 자주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로 인해 작가님과 작가님의 어머니는 너무 큰 고통을 겪는다. 어머니가 제발 아버지와 이혼하길 원했으나 장애가 있는 남편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가 주는 고통을 어머니와 함께 나눠야했던 작가님. 알콜중독까진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알콜의존 정도는 충분히 의심되는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술을 좋아했고 여자도 좋아했고 도박중독은 확실했던 나의 아빠도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 종종 물건을 때려부쉈다. 아빠와 사귀는 여자가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적도 있다. 도박으로 수없이 돈을 날리고도 집의 보증금까지 헐어 도박을 했다. 작가님의 아버지는 작가님이 21살 때, 나의 아버지는 내가 28살에 돌아가셨다. 아빠를 떠올리면 함께 따라오는 단어는 술, 여자, 도박이다. 고맙게도 아빠덕분에 나는 술을 싫어하고(술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가정이 있음에도 바람피우는 인간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도박은 주식투자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장기투자에는 거부감이 없지만 단타는 명백한 도박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님과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어머니의 존재다. 작가님에겐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어떻게든 학원비를 벌어 딸을 공부시키려 애쓴 어머니가 있었다. 나에겐 원래도 가깝지 않았고 지금은 거의 왕래가 없는 새엄마가 있다. 내가 5살 때 엄마와 이혼한 아빠는 나를 홀로 키우다 내가 9살 때 새엄마와 재혼을 해 쭉 같이 살았다. 아빠로 인해 고통이 너무 컸던 새엄마와 나의 사이가 좋기는 힘들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나에게 취직해 돈을 벌라며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던 새엄마. 내가 고3때 결국 아빠로 인해 집을 나갔던 새엄마. 수능을 친 후 대학 등록금이 없어 아는 지인에게라도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던 내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던 새엄마. 새엄마가 겪은 고통이 내 아빠로 인한 것이기에 아빠의 딸인 내가 미안함을 느꼈던 시간도 있었으나 이젠 함께했던 시간, 미안하고 섭섭했던 그 모든 감정마저 흐릿한 관계가 되어버린 새엄마.

어린시절 겪은 고통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작가님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죽음은 달랐다. 아빠는 오랜시간 심장질환을 앓았다. 일상생활은 가능한정도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대학졸업 후 직장에 취직해 일한지 몇 달 지나지않아 아빠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치료만 받으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는데 며칠 후 상태가 악화된 아빠는 수술을 받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아빠는 무책임하고 자유롭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혼 후 어쨌든 홀로 나를 키웠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나에게 종종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아빠를 미워했고 어른이 된 후에는 가족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길 바랐기에 아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슬프긴 했지만 크게 애통해하지 않았고 지금도 종종 그립지만 아빠가 남긴 빚 1억을 생각하면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작가님의 아버지는 자살했다. 대학합격 후 부산에서 대구로 작가님이 집을 떠나고, 어머니와 아버지만 집에 남겨졌으나 술을 마시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도 그 집을 떠나 결국 홀로 남겨진 작가님의 아버지가 자살을 한 것이다. 그렇게 가족에게 고통만 안겨준것도 모자라 죄책감까지 남긴 작가님의 아버지. 책을 읽는데 가슴이 콱 막혔다. 나라면 어땠을까. 20살이 되어 알바를 시작한 이후 아빠는 종종 내게 돈을 빌렸다. 처음엔 몇 번 빌려줬지만 이후엔 매정하게 거절했다. 아빠가 운 좋게 치료를 잘 받아 돌아가시지 않고, 계속 술 마시고 도박을 하다 돈이 필요해 내게 연락을 하고, 나는 매정하게 그걸 다 끊어버리고, 견디다 못해 부녀간의 인연까지 끊겠다고 했을 때 상심한 아빠가 자살이라도 했다면? 차마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미성년자녀에게 성인 부모가 응당 해야 하는 의무란 무엇인가요? 제가 선택한 것이 없으니 제겐 잘못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도 되나요? 가족에 대한 제 로망은 이미 일그러졌겠죠? 아빠를 그만 원망하고 용서해야 할까요? 저의 불안은 가족에 대한 것일까요, 가난에 대한 것일까요? 왜 가족의 가난이 저의 가난이 될까요? ​

상담을 하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고모, 엄마, 아빠에게서 한 발씩 멀어졌다. 11회째부터는 상담료를 낼 수 없어서 상담을 받지 못한 내게 아직 해소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2000원이면 샀을 번개탄으로 죽은 아빠와 죽지 않고 입원해 월 80만원짜리 치료를 받았을 아빠 중 내게 더 깊은 가난을 안겨줬을 아빠는 누구일까.

일인칭 가난 120p -


올해 40살이 된 나는 10대, 20대 시절 겪은 가난과 상처의 기억과 감정이 이제 흐릿하다. 심지어 가난했지만 자유로웠던 20대시절이 그립기까지 하다. 30대엔 출산과 육아, 부당해고와 재취업, 아픈 고양이 돌봄과 고된 회사생활이라는 또 다른 삶의 과제를 수행하게 된 덕이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내가 만든 가족을 통해 치유하는 중이고 가난의 흔적은 부자가 되겠단 꿈으로 지우는 게 아니라 언제든 다시 가난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을 마음의 훈장으로 남겨두며 워라밸을 사수하는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는내내 흐릿했던 내 10대, 20대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프기도 했지만 작가님 말대로 "우리가 우리를 알아갈"수 있어서 좋았다. 위로가 되었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이 책이 200p를 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가님이 경험한 가난은 책에 압축해서 충분히 꾹꾹 눌러 담겨있다. 200p가 넘으려면 이제 작가님이 찾은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이 들어가야한다. 올해 20대 후반을 보내고 있을 작가님이 30대가 되면 20대 시절을 나름 정리하며 저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빈곤 계측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10p)하기에 더 많은 가난의 이야기가 쓰여지고 전해지기를. 작가님의 다음 책에는 작가님이 쓴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있기를 기대하며, 더 많은 우리의 이야기를 기다려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