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
2009년 방송된 <선덕여왕>의 비담으로 처음 만난 김남길. 비담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매력적이었기에 깊이 빠졌었는데 이후 배우 김남길의 행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군대에 다녀와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를 했다는 건 알았지만 나에게 김남길은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비담까지였다.
드라마 <빈센조>에 거의 정신 못 차릴 만큼 빠진 후 박재범 작가에게 관심이 갔다. 그가 열혈사제 작가라는 걸 알았고 크게 흥행했지만 딱히 당기지 않아 보지 않은 열혈사제 1에 이어서 열혈사제 2가 곧 방영예정이란 소식에 박재범작가에 대한 호감으로 본방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비담은 정의로움과 코믹함을 겸비한 유쾌한 캐릭터 김해일 신부로 변신해 악당을 때려잡고 있었다. 텐션이 너무 높은 드라마라 좀 버거웠지만 아들이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어쩌다 옆에서 함께 전편을 본방사수했다.
열혈사제 2에서 김해일 캐릭터야 말할 것도 없이 멋지지만 놀라운 것은 배우 김남길의 발견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니 비담시절보다 더 멋진 배우가 되어 있었다.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담겼지만 그건 그것대로 멋있었고 눈빛은 더 깊어진 배우. 그러고 보니 김남길이 그동안 작품을 정말 많이 찍었네? 싶어 내가 몰랐던 그의 과거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길스토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회공헌활동을 오랜 시간 해왔고 적지 않은 작품들을 꾸준히 찍었고 SBS 연기대상은 두 번이나 받을 정도로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 자신이 받은 사랑을 최선을 다해 돌려주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 김남길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김남길을 재발견한 만큼 따라잡아야 할 작품이 많았다. 웰메이드 드라마로 호평이 자자한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부터 정주행을 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트리거>도 다 봤다. 유난히 경찰캐릭터, 또는 경찰이 아니라도 악당을 때려잡는 정의로운 캐릭터를 많이 맡은 배우. 액션연기로는 따라올 이가 없고 섬세한 감정연기에 코믹연기까지 다 되는 배우. 2009년의 그 앳된 비담을 기억하는 나로선 좋아하는 배우가 그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필모와 스토리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거>를 찍고 난 후 진행한 김남길의 인터뷰는 더욱 감동이었다. 악당을 마냥 때려잡기만 한다면 사이다는 줄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만 보여주는 게 맞는지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트리거는 증오하는 인간이 있는데 내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 과연 쏘지 않을 수 있냐고 질문하는 드라마다. 주인공인 경찰 이도는 그런 방법으로 복수를 해선 안되고 또 왜 해선 안되는지를 말하는 캐릭터고. 사적복수를 거침없이 해버리는 <빈센조>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그 드라마에 메시지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적복수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나라의 썩어빠진 법체계와 기득권을 드라마는 비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트리거>가 던지는 질문도 너무 중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빈센조처럼 강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으니까. 사회비판은 비판대로 해야 하고 개인은 개인대로 또 고민할 지점이 있는 것이다.
작품을 고를 때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답게 <트리거>를 찍으며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연기했을지가 느껴졌다. 예능에서는 한없이 귀엽고 발랄하고 사랑스럽다가도 드라마에서는 이보다 더 깊고 슬플 수 없는 눈으로 감정을 표현하다가 긴 다리로 사정없이 완벽한 액션을 보여주질 않나... 깊고, 유쾌하고, 한결같고, 따뜻하고, 성실한 배우 김남길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사람 미치게 하는 미모얘긴 너무 당연해서 생략!)
사실 난 금사빠라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 곧잘 빠져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지속되지 않는 건 배우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남자연예인들의 사건사고 뉴스를 보며 내가 좋아하는 그들의 진짜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름을 늘 생각하려 애썼다. 좋아했던 연예인에게 뒤통수 맞은 적이 몇 번 있어서 두 번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는 건 환상일 뿐, 그들이 진짜 어떤 사람인 지는 결코 알 수 없으며 나는 그저 그들이 파는 이미지를 소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대상을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이렇게 많이 좋아하게 되었으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건 너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오래전 좋아했던 배우를 다시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가 차고 넘쳐서였다. 물론 그럼에도 실제 김남길이 어떤 사람인지 난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또다시 믿고 싶어 졌다. 김남길이 좋은 배우이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앞으로도 좋은 배우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오랜 시간 쌓인 그의 ‘한결같음’이다. 배우 김남길이 앞으로 걸어갈 길이, 쌓아갈 시간이 나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