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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영 Jan 07. 2021

엄마가 그립지 않습니다

에밀아자르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고  

5살 때 난 엄마와 헤어졌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아빠가 날 키웠기 때문이다.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인지 이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음에도 엄마를 그리워한 기억이 별로 없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몇 번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긴 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가 무책임하게 날 버린 거라고 말했지만 엄마의 이야기는 달랐다. 아빠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한 거라고 했다. 너무 화가 나 아빠와 나를 떠났지만 이후 종종 내가 있는 곳에 찾아와 나를 멀리서 보고 갔다고 했다. 재혼 후 두 딸을 낳고 살고 있는 엄마는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짧고 또 기억에도 거의 없어서인지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엄마와는 연락이 끊겼고 엄마를 못 본 지 20년 가까이가 지났다. 난 지금도 엄마가 별로 보고 싶지 않다.     


9살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난 후 오랜 시간 엄마를 그리워해온 남편은 종종 내게 왜 엄마를 찾지 않느냐고 물었다. 살아있을 때, 만날 수 있을 때 만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크게 그립진 않았지만 8년 전 아빠가 돌아가신 후엔 엄마의 소식이 부쩍 궁금하긴 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니 엄마의 이름이 함께 나왔다. 동사무소에 문의하니 엄마의 현재 주소지가 나와 있는 등본을 발급해 주었다. 무작정 그 집으로 찾아갈 순 없으니 전화번호라도 알고 싶어 통신사에 연락을 해보았다. 개인 정보라 가족이라는 증빙을 해도 알려줄 수는 없다고 했다. 악용될 수 있으니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에게 연락해 딸이 찾고 있다고는 정보 정도는 나라에서 전해주면 좋지 않을까라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렇게 몇 번의 노력을 하다 이 일을 더 지속할 만큼 엄마를 그리워하는 건 아무래도 아니라서 그만두었다. 남편은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주인공 모모의 엄마는 창녀다. 모모는 창녀가 낳은 아이를 맡아서 길러주는 일을 하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산다. 다른 아이들의 엄마는 종종 아이를 보러 오기도 하고 꾸준히 연락을 하는데 모모의 부모님은 모모를 찾아오지도 않을뿐더러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부모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모모의 양육비를 보내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도 모모는 알 수 없다. 소설 후반부에는 드디어 모모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가 왜 모모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숨길 수밖에 없었는지가 밝혀진다. 모모의 아버지는 포주였고 모모가 태어난 후 모모의 엄마를 죽였으며 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자신의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아이를 보여준다.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고 아랍인인 당신의 아이를 유태인으로 키웠다고. 남자는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 그대로 죽어버린다. 이웃의 도움으로 시체는 집 밖으로 치워지고 모모는 남자의 옷에서 뭔가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찾다가 한 개비 남은 담배를 발견해 피운다. 그렇게 모모는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를 남자와 이별한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죽였고, 이제 와서 아이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며 찾아온 남자.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죽어버린 남자. 진짜 모모의 아버지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도 않은 남자. 모모에게는 함께 공유한 추억도, 마음을 나눈 기억도 일절 없는 그냥 한 남자의 죽음일 뿐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모모가 알게 된 사실은 분명 너무나 충격적이다. 진실을 몰랐을 때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은 모모가 받은 충격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모모가 이별하는 모습만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마치 “핏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모가 정작 가장 사랑한 사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단 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을 키워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로자 아줌마일 테니 말이다.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와는 그렇게 쿨하게 이별할 수 있었던 모모였지만 죽음을 앞둔 로자 아줌마는 결코 혼자 둘 수가 없어서 죽어가는 그 모든 시간을 곁에서 지극하게 지켰던 모모였으니까.


소설 속에서 누구에게든 관심을 받고 싶어 도둑질을 하고 위험한 도로를 질주하는 모모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건 ‘엄마’가 주는 사랑은 아니었으니까. 부모의 사랑이란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유일하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안전지대다. 그 기대에 배신을 당하면 평생을 살아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혈연이라면 마땅히 그런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평생의 족쇄가 되기도 한다. 나를 떠난 엄마에 대해서 나 또한 그런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치부처럼 느껴졌다. 내가 가진 성격적 결함, 미성숙, 인생에서 겪은 불운들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리 생각하고 싶다. 남편이 엄마를 오랜 시간 그리워하는 이유는 엄마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자신이 자랐고 함께 공유한 추억이 있으며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처가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엄마는 다른 존재다. 나를 낳아준 것이 고맙고 아빠로 인해 고생한 것이 안타깝고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나는 엄마를 그리워할 만큼 사랑을 주고받은 경험이 없다는 걸, 날 떠난 엄마에게 큰 상처를 받진 않았다는걸, 세상엔 이런 모녀관계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고 싶다.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사랑으로 종종 미화되는 ‘모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 또한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한 나 자신을 오랜 시간 연민했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다.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닿아 엄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애틋한 마음으로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 떨어져 산 우리가 꼭 다시 만나 모녀간의 정을 회복하고 가족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혈연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서 꼭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자식의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의 시체 옆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선 모모처럼 세상엔 미움도 애정도 굳이 애써 가지려 들지 않고 이별하는 부모와 자식이 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이제는 엄마와 그렇게 이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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