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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Sep 27. 2022

(에세이) 19. 운명을 믿으세요?

가을. 

하늘은 끝이 없을 것처럼 고, 푸른 바다를 시샘하듯 청명하다. 나무들은 여름내 땀에 젖은 옷이 부끄러운 듯 발그레해진다. 삽연히 불어와 흰 뺨에 부딪히는 바람은 달달한 꿀처럼 달콤하다. 자연이 주는 풍광과 기운이 나에게 연애를 재촉하는 것 같다. 사계절 중 유일하게 사랑이 허락된다면 오로지 가을뿐이다. 가을에는 사랑을 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계절에 더 의미를 둔다. 새 학기를 알리는 봄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은 설렘에 사로 잡히게 만든다. 한 여름, 피서지에서 꽃핀 인연도 많다. 겨울은, 크리스마스라는 대형 이벤트로 모든 남녀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가을에 비할바가 아니다. 가을은 우주 만물이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결실을 맺은 열매처럼 인간의 삶도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면서 결실을 맺을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와도 한결같이 인기를 끄는 게 있다. MBTI이다. 한 뼘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려도 MBTI 알게 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시국에 더 인기가 많은 것일까? 젊은 세대의 모든 대화가 기승전 MBTI로 느껴질 정도다.


내향형인 내가 외향형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른 행성이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이설이라며 웃어넘길 도 있겠지만, 적어도 예민한 나는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고 오로지 공존만 가능한 관계인 것이다. 섞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서글퍼지지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희망적이다. 





하지만, 위 사진에 따르면 극심한 내향형인 내게도 잘 맞는 MBTI가 있다. 사진표현을 빌리면 '천생연분'이란다. 정말 사람에게는 다 짝이 있는 것일까?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한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정말 ENFP와 INTJ가 만나면 이런 모습일까?(설마 내가?) 피식자가 포식자를 무심히 끌어안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인상 깊었다. 상어는 분명히 'NO'라고 외치고 있지만 좋은 기분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 탓일 것이다. 누군가 내게 연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그려 볼 것이다. "연인끼리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츄리링 차림에 손깍지를 끼고 걸으면서 실없는 농담에 웃는다. 빌려 입은 내 옷이 커서 흐르는 소매를 계속 신경 쓰며 걷는 여자친구. 그 모습을 지켜 보며 아빠 옷을 입은 아이를 바라보듯 흐뭇한 미소를 짓는 내 표정." 일 것이다. 나는 저 사진 속 동물 두 마리가 붙어있는 모습에서 내가 생각한 연인의 모습을 봤다. 나에게 천생연분이란 이 사진 같은 모습이다.


-누군가 정의하기 위해 MBTI까지 끌어들이는 게 아직도 불편하지만- 나의 MBTI에 따르면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상 운명론을 믿을 수 없는 족속이다. 사실 운명론이 가져다주는 허무주의가 낯설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게 맞는 표현 같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 잡히면 운명이란 단어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 종교도 없고 신의 존재 또한 부정할 정도로 무신론자이지만, 가끔씩 알 수 없는 기운이 감싸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향형을 두려워하는 내가 ENFP에게 호감을 갖는 다면, '운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한국 멜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번지 점프를 하다'에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바로 인연이다."

인연(因緣)을 뒤집으면 연인(戀人)이다. 물론 한자는 다르다. 하지만, 두 단어의 인과관계를 보면 어느 단어가 먼저 와도 상관이 없다. 인연 없이는 연인도 없는 것이고, 연인은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는 같은 단어로 혼용해도 뜻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두 단어 중간에 빠진 게 있다. 사랑이다. 인연이 계산도 안될 확률로 만나는 것이라면, 타인과 타인이 사랑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확률과 기적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연인이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모든 연인 관계를 운명이라고 규정해도 되지 않을까?


10년 전 한창 멜로 영화에 빠져 살 때 '이터널 선샤인' 이란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 마음만 먹으면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운명적인 만남으로 맺어진 연인은 파국에 이르렀고 남 주인공은 기억마저 지우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옛 여자 친구가 자신의 기억을 모두 지운 걸 알게 되자 남 주인공은 자신도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지우는 과정에서 행복한 잔상들이 밀려와 괴로워하지만 결국 모든 기억을 지운다. 그리고 둘은 우연으로 가장한 필연으로 다시 운명적으로 만난다.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것이다. 내 생에 운명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매개체는 이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우연인 것 같지만 사실 필연인 것,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는 것이다.


사전에 없는 단어지만, '온쪽'이란 단어가 있다. 이성을 흔히 반쪽이라고 말하는 데, 남녀 반쪽과 반쪽이 하나로 합해져서 온쪽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식으로 합해지면 온쪽이 되기 힘들다. 스스로 온쪽이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해도 결코 온쪽이 될 수 없. 진정한 만남은 온쪽과 온쪽이 만나야 한다.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온쪽이 될 수 없고, 반쪽끼리의 만남은 또 다른 반쪽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둘이 있으면 귀찮은 마음이 들어서는 안된다. 둘이 있으면 둘이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아다.


진정한 운명이란 내가 온쪽이 됐을 때 온쪽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이 단어를 알려준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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