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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Apr 17. 2024

(에세이) 28. 난 그냥 그녀를 포기하겠어.

 숏폼이 유행하면서 덩달아 '도파민'이라는 단어도 유행하고 있다. 물론 숏폼이 등장하기 전에도 도파민을 언급하며 자신의 흥분된 감정 상태를 빠르게 이해시키려는 얼리 어댑터가 이따금씩 보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자극에 관련된 표현들을 모두 도파민으로 퉁치려는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도파민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나도 사실 잘 몰라).

 

<<도파민형 인간>>이라는 책에 따르면 도파민은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 즉 예측가능 한 것, 익숙한 것에는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 도파민 활성은 쾌락의 지표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성’, 즉 가능성과 기대에 대한 반응이다. 모두 어떤 기대감에 도파민 폭발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애인의 편지(무슨 내용일까?), 오랫동안 뜸했던 친구로부터 온 카톡(어떤 소식이 적혀 있을까?), 클럽에서 만난 매력적인 상대(이 사람과 어디까지 가게 될까?) 등등…. 하지만 이런 일이 일상이 되면 신선함은 사라지고 도파민이 솟구치는 일도 더 이상 없다. 달달한 사랑의 속삭임도, 장문의 이메일도, 새롭게 단장한 클럽의 깔끔한 인테리어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롤링스톤즈의 리드 보컬인 믹 재거(영국의 싱어송 라이터, 한국에서 조용필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가수)가 2013년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는 평생 4만 명에 가까운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남자의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에 가깝다. 적당히 그의 의도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하자.) 지금까지 만난 상대가 4만 명이 넘을 정도라면 도파민이 그 사람의 삶을 조종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섹스에 관한 한 말이다. 그러나 욕심을 점점 더 키우기만 하는 게 이 도파민이라는 놈의 본성이다. 그러니 만약 재거가 반백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는 죽는 날까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만족’이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신기루다. 도파민이라는 화학물질에 이끌려 평생 그것을 쫓아다니지만 결코 거머쥘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녀를 침실에 들이는 데 성공한 바로 다음 날, 그의 목표는 다음 미녀를 찾는 것으로 재설정된다. 그런 식으로 재거는 단 하루도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믹 재거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사랑이 식는 이유를 낯 뜨겁게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그래서 사랑이 식는 이유가 뭔데!? 아는 사람만 아는 이 비밀, 나는 도파민 때문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싶다. 애초에 인간의 뇌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갈망하도록 빚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갖가지 가능성을 자양분 삼아 미래를 꿈꾼다. 반면 익숙해진 것에는 흥분과 기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흔한 사랑얘기를 해보자. 나도 너도 그리고 자라날 우리 아이들도 하게 될 연인과의 뻔한 사랑 이야기 말이다. - 넌 변했어! 예전엔 너 안 그랬잖아! 너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왜 사랑이 식었는데? - 연애를 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귀 혹은 입에 담아봤을 말들이다(아직이라면 미리 연습을 해보거나 들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상상해 보는 것도 좋다). 연애 초기에는 잘 싸우지도 않고 싸우더라도 금방 화해한다. 상대를 갈망하게 만드는 도파민이 계속 분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킨십이 누적될수록 싸움은 잦아지고 한 번 화가 나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상대를 갈망하는 마음이 줄어든 빈자리를 화가 메꾸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간극이 벌어질 때로 벌어진 커플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그리고 다시 도파민을 분출시켜 줄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우리는 종종 남녀 관계를 물고기에 빗대어 표현한다. '어장 관리', '잡은 물고기는 밥 안 준다.' 등등 썩 좋은 비유들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멍청한 물고기를 의인화한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까닭에 나도 한 번 사용해보고자 한다.

어항에 새로 들어온 물고기는 볼 때마다 흥미롭다. 어항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모습, 사료를 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모습, 산란하는 모습 등 때로는 예쁘고 때로는 귀엽고 어쩔 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혼이 빠져 앞에서, 옆에서, 위에서, 뒤에서 계속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고,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물고기를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밥을 주고 어항 물도 갈아주고 이름도 불러준다. 더 이상 보는 것이 설레지는 않아도 안 보면 서운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린 이런 상태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사람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필코 상대에게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책할 필요도, 상대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종(species)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진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뉴욕 주립대학교의 심리학자 비앙카 아세베도와 그의 동료 아서 아론이 관련 문헌을 분석한 결과 사랑은 서로 만난 지 12개월에서 15개월이 지난 뒤부터 옅어지기 시작하며 4년 또는 7년 차에 이르러 감정적인 위기를 맞고 10년 차에 이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연예인들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절세 미남 미녀를 반려자로 맞이했음에도 바람을 피우지 않는가?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애인을 만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싸우는 횟수도 비례해서 많아졌다(권태기!). 반면 같은 상황을 맞이했던 누군가는 이 시기를 차분하고 의연하게 극복했다. 아마도 자신의 호르몬 변화를 받아들이고 상대의 모든 행위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그 사소한 것을 잘 알면서도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연애를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연인과의 싸움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치명적인 잘못이 아니라면 그냥 져주고 넘어갈 것이다. 나는 나의 뇌를 조종해서 도파민을 자의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아무개의 말에 따르면 이혼하지 않고 오래 살아가는 부부들은 잘 맞아서가 아니라 둘 중 한 명이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남녀관계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중이거나 그것을 넘어 결혼한 상태라면 그냥 포기하고 살아라. 그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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