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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Jul 28. 2022

(에세이) 10. 홀가분해지고 싶다.

"정말 홀가분해지고 싶으면, 그냥 죽어."

죽마고우는 투덜거리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지 끝내 한 소리를 하고 만다.


가슴 한 구석이 짓 눌릴 만큼 답 없는 문제에 정신이 지배당할 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허의 공간으로 달아나고 싶다. 살면서 겪는 억겁의 고난이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에 부딪칠 때, 두 손을 모으고 운에 기대는 방법밖에 없다. 모든 걸 체념한 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간혹 내 바람대로 흘러가버리는 기묘한 기류를 경험한다. 그 순간 내 몸과 마음은 자석의 N극이 동일한 자력을 가진 N극을 밀어내는 듯 모든 고통을 물러나게 만든다. 비로소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홀가분하다.'


호감 가는 이성. 다가가면 더 멀어질까 봐 조심스럽다. 적당한 거리에서 낚싯대를 들이밀었더니 미끼를 덥석 문다. 서로 알아가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우리는 지금 썸을 타고 있는 건가? 기쁨도 잠시. 알면 알수록 별로인 사람. 처음에 그린 모습은 착시였다. 연인으로 발전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관계를 절단 내서 남남이 되는 건 더 싫다. 이런 애매한 관계. 무 자르듯 단순히 칼을 들이밀어 홍해 갈라지듯 분명하게 가를 수 없다. 적어도 한쪽 혹은 양쪽 다 망가지지 않도록 두부 자르듯 조심스럽게 잘라야 한다. 서로 반대편을 보고 다 어느 순간 뒤 돌아봤을 때 상대가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걸어야 한다. 만남에서 전화, 전화에서 메시지, 10개의 메시지에서 1개의 메시지, 결국 0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홀가분해진다.


국내 최고의 회사. 그 회사에서도 가장 힘이 넘치는 부서 구매팀. 유연성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목이 뻣뻣한 담당자. 내가 아끼는 목 마사지기를 이별 선물로 건네고 싶다. 그렇게 뻣뻣하던 담당자가 사기를 당했다. 메일을 해킹한 사기꾼이 기존 거래처 담당자로 위장해 다른 계좌로 물품 대금의 입금을 요청했다. 사기꾼에게 송금한 금액은 일반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서 일해도 벌 수 없는 액수였다. 항상 뻣뻣해서 감정이라고는 절대 안 느껴지던 담당자는 영혼마저도 해킹당한 사람처럼 혼이 나가 보였다. 담당자는 사직서를 냈지만 반려당했다. 회사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담당자를 놓아줄 수 없었다. 큰 사고를 저지르고 내빼는 걸 허락하지 않는 눈치였다. 수척해질 때로 수척해진 그녀를 보자 연민이 느껴졌다. 일은 결국 해결됐고 그녀는 회사에서 해방됐다. 그녀는 홀가분해졌을까?


첫 회사를 15년 넘게 다닌 사람이 하루아침에 퇴사 소식을 알렸다. "저 사람은 임원 달 때까지 다닐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애써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직장 동료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 사람을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아이처럼 신난 건 아니다. 오래 앓던 역류성 식도염이 자연스럽게 치유돼 뜬금없이 터져버리는 마른기침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처럼 기뻤다. 그 사람은 내 기준에서 소위 말하는 꼰대였다. 합병 전에 함께 근무하던 일 잘하는 직원들을 회상하며, 너네가 뭘 알겠냐는 식으로 기분 나쁘게 말하곤 했다. 그 사람은 업무가 엮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선 평판이 좋았다. 대부분의 상사들도 그 사람을 신뢰했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후배들 대부분은 그 사람을 싫어했다. 그 사람은 전형적인 윗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아랫사람은 깔아뭉개는 스타일이다. 그 사람한테 당할 때마다 속으로 "넌 구석기시대에 태어났으면 나한테 돌도끼 맞 뒤졌어."라고 되뇌었다.

회사가 가장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 가장 오래 회사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 때다. 고일대로 고여 악취가 진동을 하는 썩은 물. 그 사람을 못 버틸 것 같아 퇴사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이 먼저 떠났다. 나는 홀가분해졌다.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귀찮은 일. 만나기 싫지만 계속 엮이는 껄끄러운 사람. 홀가분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근데, 그런데 말이야.. 혹시 사람들도 나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썸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나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싶었고, 해킹을 당한 거래처 직원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영업 사원인 나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싶었고, 퇴사한 직장 상사는 낭만 가득했던 시절을 공감 못하는 MZ 세대 직원인 나 때문에 홀가분해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내가 누군가를 홀가분해지고 싶 마이 들게 하는 건 아닌지 먼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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