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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Jul 27. 2022

(에세이) 9. 그녀의 식욕이 넘치는 이유

정확히 10년 전 '비포 선라이즈'를 감명 깊게 봤다. 그 당시에도 오래된 영화였는데,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가 돼버렸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낯선 여행지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짧은 시간 안에 서로에게 강하게 끌린다. 만약 두 주인공이 매일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만났다면, 제 아무리 한눈에 반할 이상형이었다고 해도 과연 강하게 끌렸을까? 이성적인 판단이 앞설 수밖에 없는 환경은 서로를 기차 안에서 느꼈던 감정으로 몰고 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낯선 장소만이 그들에게 강한 끌림을 허락했으리라.


낯선 공간에서 발생하는 운명적인 만남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소재지 현실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에 이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 단정했다. 업무 특성상 자주 기차를 탔는데 이상형은커녕 젊은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은 적도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만드는 것'이라는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문장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모든지 가능하다. 적어도 난 그렇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한다면, 그건 여행지라서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향형이다. 낯도 가리고 붙임성도 없다.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왔는지 대견스러울 정도다. 그런 내가 낯선 여행지에서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건 개인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일상에서 여자가 말을 걸어와도 무심하게 "아.. 네.." 정도로 대꾸하고 외면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낯선 여행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성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바다가 주는 고요함에 마음에 동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와 내가 바닷가를 거닐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맥주와 새우깡을 먹는 게 중요한 것이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몇 마디 이어가지 못했다.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대화한 사람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수 있는 주제들을 진솔하고 깊고 담대하게 들려주었다. 과거에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던 사건부터 자신의 독특한 취향까지 가식이라곤 한 점 느끼지 못할 흥미로운 주제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진솔함에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못해서 사실대로 잘못을 고백하는 것만 같은 순수함을 보았고 이내 끌렸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나는 다른 세상에 온 사람 얘기를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스파이더맨의 멀티 유니버스처럼 시공간이 뒤틀려 다른 세계의 사람이 건너온 것 만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떠 오른다. 전지현처럼 늘씬하고 예쁜 게 닮기도 했고, 먹방을 해도 모자랄 왕성한 식욕이 엽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엽기적'이란 단어로 한정 하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하고 찝찝하다. 그녀는 그냥 다른 종류의 사람 같았다. 내가 말하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란 외계 행성에서 온 생명체가 사람 뇌에 잠입해서 사람 몸을 몰래 조종하거나, 천년 묵은 요괴 쥐가 사람 손톱을 먹고 둔갑했다거나, 전우치전에서 도술로 강아지를 사람으로 둔갑시킨 초랭이 같은 것이었다.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복귀한 뒤 며칠이 지나 그녀 다시 만났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의 온도와는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서너 시간 뒤 그녀는 아침을 챙겨달라며 나를 깨웠다. 자신은 아침을 먹어야 되기 때문에 늦잠을 못 잔다고 했다. 나는 늦잠 잘 자고 아침은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벌떡 일어나 입이 작은 그녀가 한 입에 넣을 수 있게 토마토를 여러 조각내 삶은 달걀과 아몬드를 함께 내밀었다. 그녀는 내 침대 옆 책상에 앉아 붉은색 토마토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잠결에 그 씹는 소리가 어릴 때 키우던 흰 토끼가 배추 입을 갉아먹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검게 탄 누룽지같이 까무잡잡한 그녀가 새끼 흰 토끼보다 더 하얗고 작디작게 느껴졌다.


짧은 만남 이후로 그녀와 만날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인연이 닿으려고 할 때마다 필연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녀는 잔상만 남긴 채 희미해졌다. 그녀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그녀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했던 거의 유일한 것이었고 포기한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내 머릿속엔 그녀의 독특한 식욕만 남았다. 밥 반 공기도 벅차 젓가락으로 밥알 몇 번 헤집다 말 것 같이 가녀려 보였던 그녀. 사실은 햄버거를 먹고 후식으로 마라탕을 먹어대던 그녀. 코로나로 인후통에 몸져누워있다가 밥때만 되면 벌떡 일어나 통밀빵에 열심히 피스타치오 쨈을 발라 먹어 넘기던 그녀.


기쁨이 밀려오고 난 자리를 공허함이 채우듯 아픔이 밀려오고 난 자리도 공허함이 채운다. 그녀의 왕성한 식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가득 메워졌던 마음이 시간에 깎여 나가고, 그 자리를 차지한 공허함을 밀어내기 위해 음식을 채운 것이다. 그녀는 이 순간도 허기를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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