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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Jul 29. 2022

(에세이) 11. 전 여자 친구와 썸 타기 - (1)

"나 차단했어?

왜 전화를 안 받아...?"


자정을 넘긴 시간. 깜깜한 방 침대 위, 베개 옆에 놓인 스마트폰이 환한 빛을 발산하며 진동을 울린다. 눈을 감은 채로 음량 버튼을 눌러 진동을 끄고 화면을 뒤집는다. 급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불면증으로 잠드는 게 어려운 나는 연하게 잠들어버린 상태를 지속하고 싶다.


아침 7시 40분 어김없이 울린 스마트폰 알람 소리. 어젯밤도 뒤척이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된 태블릿 PC로 유튜브 어플을 켜서 '연합뉴스 TV' 채널을 튼다. 정신없이 흘러나오는 기자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본다. 침대 옆 이케아 철재 선반 두 번째 칸에 놓인 해외에서 직구한 유산균 약 통을 움켜쥐고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다. 방바닥에 우뚝 솟아 있는 반쯤 물이 담긴 스파클 2L 병의 뚜껑을 열어 입에 닿지 않을 거리에서 입 속 안으로 물을 따른 뒤 알약을 삼킨다. 샤워를 하기 위해 스마트 폰을 쥐고 화장실로 향하며 '연합뉴스 TV'를 틀고, 스마트폰 화면 최 상단을 손가락으로 내려 간 밤에 온 카톡 메시지를 확인한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의 메시지가 보인다. 정신이 번쩍 들며, 어스름이 보이던 화면이 갑자기 밝아진다. 어젯밤 전화도 그녀였다.


메시지를 읽고 답장하지 않았다. 별로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어진 날 크게 다투던 일은 다 잊은 건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헤어진 지 꽤 오래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게 카톡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다. 항상 제멋대로인 아이. 다시는 연락하고 싶지 않다.


그날 밤 자정이 다 돼서 또 전화가 왔다. 내가 불면증이 있는 걸 잊은 건가? 처음엔 술에 취해 전화한 줄 알았는 데 이틀 연속이나 전화하는 건 분명 확실한 목적 있는 것 같았다. 목적이 있으면 무엇하리. 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사람.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눈을 감은채 잠이 오길 바랬다.


다음날 저녁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를 떠 올렸다. 잠자리에 들었다면 분명 전화를 무시하고 차단 했을 것이다. 그러나 퇴근 길은 항상 기분이 좋기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3일 연속 전화를 거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 : "여보세요"

상기된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최대한 낮고 두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 "이제야 받네?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왜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무시해?"


나 : "좀 당황스럽다.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받았어.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해줄래?"


그녀 : "오빠 요즘도 운동 매일 해? 금요일에 운동 끝나고 시간 되면 잠깐 만날래? 집 근처로 갈게"


나 : "갑자기? 왜 갑자기 보자고 하는 건데? 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녀 : "만나서 얘기해 줄 테니 깐 그냥 잠깐 나와라.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깐 밥만 먹고 들어가 그럼"


나 : "좀 당황스럽다. 생각해보고 메시지 보낼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러닝머신에 달린 자바라 거치대에 태블릿 PC를 걸고 러닝머신 속도를 천천히 올린다. '연합뉴스 TV'를 틀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걷는다. 태블릿 PC에서 오늘의 사건을 열심히 보도하는 기자와 앵커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내 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왜 만나자고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한 건 절대로 못 참는다. 나의 궁금증을 자극 한 건 분명 성공적인 전략이다. 러닝을 끝낸 뒤 샤워를 마치고 닭가슴살을 먹으며 PC 카카오톡을 켰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지 이유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무조건 만나서 알려준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어차피 금요일 저녁엔 운동 끝나면 별로 할 일도 없는데 그녀가 사주는 밥이나 먹을 심산으로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왜 지금에서야 연락한건가? 이틀 뒤면 알게 되겠지.


금요일 저녁 8시 운동을 끝내고 샤워도 마쳤다. 전 날밤 연회색 슬랙스와 흰 리넨 셔츠를 다려 행거에 잘 걸어 두었기 때문에 머리 손질만 하면 나갈 준비는 끝난다. 물기가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바짝 발린 뒤 왁스를 발라 6대 4 가르마를 탔다. 고개를 흔들거나 바람이 불면 스타일이 망가질 것 같아 워터 타입 스프레이를 여서 일곱 번 펌핑해 머리카락을 단단히 고정했다. 8시 30분. 집에서 5분 거리 번화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나는 일부러 5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보다 10분이나 더 늦게 도착했다. 약속 시간을 15분이나 어겼다.


나 : "사람 쉽게 안 변하네"

작게 읊조렸다. 그녀를 다시 만나서 건넨 첫마디였다.


그녀 : "오빠 정말 미안해. 안 늦고 싶었는 데 전철이 좀 막혔어."


나 : "그러게? 서울 지하철 많이 막히지?"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죽마고우처럼 안부를 묻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삼겹살에 소주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종업원이 불판에 붙어서 구워주는 두툼한 삼겹살 집으로 안내했다.


나 : "솔직히 다시 보니 반갑네. 우리 안 본 지 한 3년 됐나?"

'헤어졌다'라는 단어 대신 '안 봤다'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헤어진 연인이라는 사실을 고기 굽는 종업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 : "그 정도 됐나? 오빠는 여전히 보기 좋다. 역시 관리 잘하네!"


나 : "근데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갑자기 왜 연락한 거야?"


그녀 : "그냥 연락했어. 갑자기 오빠 보고 싶더라. 요즘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일 끝나면 집에서 드라마만 봤거든? 근데 남자 주인공들이 다 너무 괜찮은 사람들인데 오빠 모습이 계속 보이는 거야? 처음엔 그냥 오빠랑 닮았다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이 점점 커져서 연락까지 하게 됐어."


나 : "나는 무슨 일이 정말 있는지 알았어. 다시 못 볼 줄 알았는 데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서 술 한잔하니 좋다"

우리는 사겼을 때 재밌었던 추억들을 기어이 끄집어내 웃고 떠들었다. 뇌는 나쁜 일은 빨리 지우고, 좋은 일은 오래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정신적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나는 그녀의 나쁜 기억을 더 이상 떠 올릴 수 없었다. 망각은 축복일까? 내 뇌는 정상적으로 진화를 했군.


그녀 : "오빠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소주 2병을 비웠을까. 살짝 동공이 풀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나 : "없어. 요즘 비수기네? 운동만 하면서 지내."


그녀 : "아 진짜?"

그녀는 떨어진 시험에 합격한 수험생처럼 함박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눈웃음은 순수해 보였다. 과거에 사귀게 된 이유의 8할은 저 눈웃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임수정을 닮았다. 나이에 비해 동안인 이목구비를 가졌다. 청포묵같이 흰 피부에 큰 눈망울과 둥근 코 끝. 못 본사이 눈가에 주름은 좀 늘었겠지만, 화장 기술이 더 늘었는지 그 어떤 주름도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 소주잔에 찍힌 그녀의 붉은색 립스틱 자국처럼, 내 머릿속에 그녀는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도 남자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헤어진 사이에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게 도덕적으로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나이를 먹더니 확실히 보수적으로 변했다. 아니면 노화로 자연스럽게 성욕이 감퇴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성적으로 바뀌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녀 : "오빠 2차 가자."


나 : "늦었는데. 다음에 다시 만나. 그리고 나 요즘 술 많이 안 마셔. 몸 생각해야지."


그녀 : "얘기 좀 더 하고 싶어서 그래.. 오빠 만나서 대화하니깐 너무 재밌다. 술 마시지 말고 오빠 집에 가서 그냥 얘기만 하면 안 될까?"


나 : "집 청소도 안 했고, 나 일하고 운동하고 술까지 마시니 피곤해서 안 되겠어."


술병에 남은 술을 다 마신 뒤 가게를 나왔다. 그녀를 택시에 태우기 위해 승강장까지 걸었다.


그녀 : "오빠. 오랜만에 만나니깐 너무 재밌다."


나 : "그렇지? '좋은 게' 아니라 '재밌지'?, 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고 재밌다."


그녀 : "응 설레는 건 전혀 없는데. 예전에 우리 사이좋았던 때처럼 너무 재밌다."


택시가 잡혔고, 그녀를 태웠다.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집까지 걸어가는 10분 동안 오늘 느낀 묘한 일들, 묘한 감정을 곱씹었다.


집에 도착해서 그녀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장문으로 온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만나기 전에는 확신이 들지 않았는 데 만나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무슨 확신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웃고 떠들었다고, 다시 만날 마음이 생길 만큼 단순한 남자가 아니다.


나 : "재밌는 걸, 호감으로 착각하면 안 돼. 우린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을 뿐이야. 외롭고 심심하면 그냥 오늘처럼 편하게 친구처럼 만나 소주나 한잔 하자."

카톡을 마무리하고 씻고 누웠다. 잠이 올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지만, 술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 대한 고민이 사라져서 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 메시지를 편하게 주고받고 밤마다 통화를 했다. 연락하는 시간은 점점 늘었고, 연인과 친구의 중간 어디쯤의 관계로 발전했다. 예전에 사귄 경험 때문인지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소통이 잘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익숙함을 설렘으로 착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길을 걷다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골목길을 걷는데,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를 피하기 위해 그녀를 내 쪽으로 급하게 끌어당겼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손까지 잡게 된 것이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과 교차할 때, 사랑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게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자주 만나 영화를 보고 한강을 걸었다. 우리가 예전에 즐기던 데이트 코스를 답습했다. 처음엔 그녀가 주로 먼저 연락했지만, 내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고, 그녀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허락했다.


한 달 정도 만났을까. 아직 연인 사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친구라고 규정하기엔 마음이 각별했다. 난 그녀와 썸을 타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만나면, 완전히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불행해지면 그만큼 행복이 찾아오듯, 행복해지면 그만큼 불행도 찾아온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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