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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묘 Jul 30. 2022

(에세이) 12. 전 여자 친구와 썸 타기 - (2)

그녀는 변했다. 메시지를 보내면 즉시 답장을 받았는 데, 몇 분에서 몇 십분, 몇십 분에서 반나절만에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단순히 메시지 답장 속도로 그녀를 단정 지으려는 건 아니다. 늦어진 답장 속도만큼 그녀의 메시지 내용도 건조했다. 더 이상 연인 사이로 오해할 만큼 애정이 묻어나던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황갈색 모레 사막 위 바짝 메마른 선인장처럼 건조한 문장들. 그런 일이 며칠 반복되자 나는 체념하기 시작했다.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거 아니랬는데.


더 이상 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만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생각이 복잡해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연락 준다는 답장을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돼버린 것만 같았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운동을 마쳤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를 만나 술 집을 가거나 함께 어딘가를 걷고 있었을 텐데,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본다. 비 때문에 산책을 못 나가는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아쉽고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서 호가든 500ml 4캔과 새우깡을 다. 우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날려 보기 위해 가장 재밌게 봤던 '무한도전' 에피소드를 켠다.


4캔을 다 비우자 취기가 올랐다. 그녀가 궁금해졌다.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화를 걸어 안 받으면 집까지 찾아가서라도 얘기를 듣고 싶었다. 저녁 11시가 다 돼서 전화를 걸었다.


나 : "전화받네?, 왜 메시지는 무시해?"


그녀 : "오빠 미안해. 요즘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연락할 수 없었어. 나 원래 좀 예민하잖아."


나 :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머리가 복잡한데? 내일 시간 되면 만나서 얘기할 수 있어?"


그녀 : "미안해. 못 만날 것 같아."


나 : "알어. 좀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하자"


그녀 : "오빠 미안한데. 이제 연락 못할 것 같아. 그 말 하려고 전화받은 거야. 미안해"


나 : "응.. 차라리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난 더 이상 기대 안 해도 되잖아. 밖인 것 같은데 집에 조심히 들어가"


나는 편의점에 다시 들러 참이슬 후레쉬 2병과 컵얼음, 새우깡 한 봉지를 샀다. 500ml 맥주잔에 얼음을 넣고 소주를 가득 채웠다. 영화 '레옹'을 보면서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마틸다가 킬러 수업을 받는 장면에서 두 병을 다 비웠다. 이 정도면 제아무리 불면증이라도 바로 뻗을 수 있겠군. 컴퓨터를 끄고 양치질을 한 뒤 침대에 누웠다. 그녀를 떠올렸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나쁜 년.. 다시 한번 잘 가라.."


오전 11시 눈을 떴을 때 방광이 터질 듯 소변이 마려웠다. 목구멍은 가뭄에 말라 쩍쩍 갈라진 논처럼 갈증을 느꼈다. 머리는 차가운 얼음 몇 개를 삼킨 것처럼 쨍한 두통이 밀려온다. 오른손으로 스파클 2리터 페트병을 쥐고, 왼 손엔 아픈 머리의 왼쪽 편을 받쳐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과음한 탓인지 배뇨작용이 끊기지 않는다. 그대로 서서 스파클 뚜껑을 열어 병 입구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두통 외엔 아무 감각도 없다.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힘겹게 집 들어 화면을 켰다. 잠든 사이 그녀에게 온 여러 통의 메시지가 보였다. 장문의 메시지는 오탈자가 많았다. 한눈에 봐도 술 취해서 쓴 게 느껴졌다. "미안해"로 시작한 메시지는 자신이 왜 복잡한 상황인지를 솔직하고 꾸밈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직전 헤어진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 남자 친구는 누가 봐도 탐낼 만큼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흠이라곤 딱 하나 바람기가 많다는 것. 그 남자의 양다리 때문에 둘은 헤어졌고, 그녀는 남자라는 족속이 싫어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헤어진 뒤 몇 일간은 그 어떤 것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출퇴근 외에는 집에 틀어박혀 오로지 드라마만 봤다. 


드라마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나랑 비슷해서 내가 떠 올랐고, 그 생각이 점점 커져 에게 다시 연락다. 에게 마음을 거의 다 열었을 때쯤 바람기 많은 전 남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그놈을 원망했지만,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고, 결국 그 쓰레기 같은 놈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가 편하고 재밌어서 잘 맞지만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도 담담히 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메시지를 느릿느릿 곱씹어가며 여러 번 읽었다. 처음엔 그녀가 더럽고 치사한 종류의 범죄만 골라 저지르는 범죄자처럼 느껴졌지만, 그녀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설렘 없는 연애는 존재할 수 없으니깐. 그녀는 정답을 골랐을 뿐이고, 나는 단지 오답이었을 뿐이다.


마지막 메시지를 뭐라고 보낼까 고민했다. 괜히 멋있는 척하고 싶었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녀가 담담히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걸 리스펙 하고 싶었다. 사실 고마웠다. 궁금하면 못 참는 성격인 나를 배려해준 것만 같았다.


"한 여름날의 꿈같네? 그 남자 별로 좋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다시 상처받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절대 원망 안 하니깐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난 네가 여전히 잘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다시는 연락하지 마. 차단할게"


그 해 여름, 다시 한번 안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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