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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Iris Feb 25. 2022

2. 처음 사랑에 빠진 날에 대한 이야기

한낱 먼지가 첫눈으로 보이게 만드는 마법


글과 함께 듣기 좋은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ACD1CumxMTo



나 예대 지원했다가 떨어졌잖아.

모 예대 실기 면접이 있던 날, 왕 큰 뾰루지가 얼굴에 나서 똑 떨어졌다는 이야기.

지금도 명절이나 가족모임에 우스갯소리로 심심찮게 나오는 엄마의 젊었을 적 일화다.


방송가, 연예계에 입문하고 싶던 20대 시절 내 엄마의 '최애 탈락 썰'은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잘 쓰임 받고 다니는 모양이다.


못 다 이룬 꿈을 가진 엄마의 딸로 태어나면 거쳐야 하는 과정일까.

성정에 맞지도 않는 뮤지컬 수업으로 이끄는 엄마에게 두 눈 질끈 감고 질질 끌려갔던 기억이 있다.




점심시간이라 담당자분이 안 계시네요.

휴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등록을 보류하고 싶었던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집으로 돌아가자는 무언의 신호를,

잡은 엄마의 손가락 끝으로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머 그래요?"


점심시간 따위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놀람,

딸의 뮤지컬 수업을 오늘은 등록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뒤섞인 엄마의 목소리.


흡사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런 그녀의 음성을 듣자마자

내 입가엔 애써 숨겨온 웃음이 슬금 비집고 튀어나왔다.

눈치 없이 꼬물대는 입술을 들킬까, 입꼬리를 제자리에 집어넣느라 나는 한참이나 진땀을 뺐다.



돌아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의 무게가 사뭇 달랐다.

그걸 본 담당자는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멀어지는 두 뒤통수에 돌이킬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하 1층에 발레 교실이 있는데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그쪽에서 발레 수업 참관하고 계시겠어요?


무겁고 탁한 발걸음

후련해 팔랑 거렸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90년 대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발레'라는 단어가

내 귀에 난생처음 내리 꽂힌 순간이다.


그러나 왜였을까?


전생의 기억은 모조리 잃고 현재를 사는 줄리엣의 잊힌 환상이 '로미오'라는 이름을 통해 다시금 피어난 것처럼,


지하 던전에 갇혀 있는 세이렌의 목소리에 홀린 선원처럼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내 몸은 부르르 떨려왔다.

어서 그 지하라는 곳을 가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서둘러 확인해보고 싶었다.


"웬 발레.."


흥분한 내 머리 위로 갸우뚱거리는 턱선이 보였다.

 

딸을 원하던 뮤지컬 수업에, 오늘, 바로, 등록할 수도 있게 된 것에 조금은 안도하면서도 뜬금없이 발레라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계단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뮤지컬 교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공기와 냄새를 마주했다.


차가운 건지 차분한 건지 불분명한 알쏭달쏭한 공기.

그 위에 한 스푼 곁들여진 긴장감과

강단마저 느껴지는 촘촘한 분위기에 일순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각진 네모와도 같은 공기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몸의 선율이,

그리고 애정이 있었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좋아요. 목 길게, 발 끝 뻗고, 등 쭉 펴고."




그곳엔 나보다 먼저 지하 던전의 세이렌에 현혹된 이들이 있었다.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들보다 내가 먼저 기꺼이 그 유혹에 빠지지 못했음에,

나는 창 밖에, 저들은 저 각진 네모 한 복판에 있음에.


하지만 곧이어 내 마음을 채운 건 반짝하고 빛을 내기 시작한 불씨였다.


어느새 속 좁은 분노 대신 행복한 자신감을 잔뜩 뒤집어쓴 내 눈엔

모든 것이 슬로 모션이었다.


아이들이 폴짝 뛰어댈 때마다 풀썩거리는 먼지도,



인간의 몸으로 도무지 저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는 발레 동작도,

내겐 그저 모든 게 그렇게 느리게 흘러갔다.



훗날 이 장면은 무용수로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 된다.

훗날 이 장면은 무용수로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된다.


첫눈, 첫사랑....

내게 이런 단어는 모두 '발레'이다.


발레 연습실에, 무대 위 공기 중에 부유하는 한낱 먼지가

흰 눈으로 보이는 마법.


나에겐 그게 발레이다.

 


각진 네모와 같은 공간에 사랑은 시작되고 있었다.

훗날 날 너무나 행복하게, 동시에 처절하게 아프게 할 내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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