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환야'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한때 일본 소설 ‘백야행’에 빠져 드라마, 영화까지 모조리 섭렵했었다. 처음 백야행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후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 ‘최애’ 일본 작가가 되었다. 하나의 작품이 성공하면 2차, 3차 창작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본.
이 책 「환야」 역시 좋은 기회에 책을 접하고 알아보니 이미 드라마로 존재하고 있었다. 책 제목도 내용도 선 출간되었던 백야행과 비슷한 면이 많았는데 역시나 백야행의 자매격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팬, 독자들 사이에서 비교 분석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두 작품 모두를 읽은 사람으로서 일단 백야행을 먼저 읽고 환야를 읽는 것을 추천한다.
백야행의 악녀 ‘유키호,’ 환야의 악의 화신인 ‘미후유.’ 희고 고운 눈처럼 아름답다는 그녀들의 이름에는 모두 일본어의 '눈 (유키 ゆき [雪]),' '겨울 (후유 ふゆ [冬])' 과 같이 겨울을 담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차갑게 시린 두 여자가 생존과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행하는 모든 범죄와 은닉의 길은 마치 눈 서린 겨울 눈 길을 맨발로 위태위태하게 걷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여주인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환야 남자 주인공의 모습도 백야행의 그와 같았다. 물론 첫 범법 행위의 트리거는 다르지만 말이다.
수작으로 꼽히는 대다수의 일본 명작은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화법은 처음엔 무던하게 읽던 독자를 어느새 주인공들과 같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인물처럼 정말 작고 사소한 일련의 일로 인해 서서히 자신의 인생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과정이 놀랍도록 차분하며 자연스럽다.
한신 아와지 대지진의 피해자이자 재난을 틈타 우발적으로 고모부를 죽이게 되는 마사야. 아무도 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습을 같은 동네의 미후유에게 들키게 되고... 미모와 지성, 그리고 차가운 심장을 가진 미후유는 무슨 생각인지, 곤경에 처한 마사야를 은근히 도우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내던져진 마사야의 인생도 꼬여만 가는데...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출판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속에서 나는 책의 표지나 디자인에도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유능한 북 디자이너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처음 알게 되었는데 재인 출판사 버전의 환야는 작품의 분위기를 잘 녹여냈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게 반짝이는 밤물결과 같은 어둠 속에 남녀가 손을 잡고 있다. 그 위로 달이 휘영청 떠올라있는데 속표지는 정 반대이다. 시커먼 달과 점들로 어지러운 모양. 글씨체도 한자 제목과 어우러지는 한글체이다. 幻夜. 속임, 허깨비의 뜻을 가진 헛보일 환幻 과 밤 야夜. 어쩌면 그들이 바랬던 모든 꿈들은 헛된 바람이 아니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그 자체의 작가 브랜드답게 첫 장부터 '읽어냄의 아쉬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독서 속도도 빠른 편이라 이런 책은 아껴 읽느라 진땀을 빼는 편이다. 오래간만에 시간을 두고 오래도록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을 만난 것 같아 기쁘다.
백야행을 인상 깊게 읽었던 모든 분들께도 추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