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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 만난 물개 May 06. 2021

#6. 퇴사일 줄다리기

퇴사를 선언하고 10일 정도가 흘렀지만,

아직 회사 측으로부터

명확한 퇴사일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오늘은 이 지루한 퇴사일 협상을

끝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었기에,

가능한 빠르게 퇴사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내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한 면담에

낭비하는 것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물개 사원, 오늘 라인별 생산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오늘 아침, 본부장님이 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다.
지난 면담 동안 유종의 미를

몇 차례나 강조하시더니,

이제는 퇴사하겠다는 사원에게

본부장이 직접 문자를 넣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하실 모양이다.
2주에 가까운 시간을 면담만 하고 다니던

퇴사 예정자에게 직접 문자를 넣어

생산 스케줄을 물어보는 것은,

퇴사하기 전까지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며

회사를 위해 헌신하라는 뜻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재미있는 회사구나...' 싶었다.

우리 팀에 남아있는 차, 부장급 직원들은

업무시간에 자리에 앉아 졸거나, 주식거래

또는 하루 종일 티타임을 즐기며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곤 한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이게 회산지 복지센터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그리고 이들이 아무런 업무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이고 있다는 것을

주변의 임직원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한 회사에서

나태해진 고위 직원들을 통제하거나

 따끔하게 경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조직의 모순된 현실에 질려

 그만두겠다는 신입사원에게

저런 문자를 보내며 압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본부장님은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회사를 떠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부장님의 문자도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점심시간쯤 되었을 때,

'라인 교체하고 있다'라고 에둘러서 회신하며

마지막 예의를 차렸을 뿐이다.
사실은, "앞으로 업무 관련 궁금하신 사항은

부서의 핵심 역할을 해야만 하는

이 부장님이나 박 차장님에게

문의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첨언하고 싶은걸 꾹꾹 눌러 참았다.




내가 퇴사 일정이 아직 안정해졌다는 것에

 불만을 표하자,

주변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회사에 남아있으면서

월급 조금 더 받다가 나가면

좋은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워 퇴사를 결심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월급을 거저 준다고 해도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하루빨리 가치 있는 일에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런 생각으로, 가능한 한 빨리 퇴사할 수 있도록

퇴사 일자를 잡아달라고

 팀장님에게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팀장님은 본부장님과 인사팀의 결정을

기다리라는 말로만 일축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괜스레 본인이 나섰다가 난처해질까

염려하는 듯한 눈치였다.
비효율적이고 답답한 조직의 일처리 방식에,

나는 절차를 무시하고

인사팀과 직접 연락해서라도

확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2주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며

 조직의 절차를 존중해 주었기에,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인사팀과 통화해서

겨우 받아낸 퇴사일이

1주 뒤인 3월 19일이었다.
여러 행정적인 처리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사팀의 입장이 있었기에

더 이상 당기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여하튼 4월 초를 에둘러 이야기하던 팀장님보다는

상당히 앞당겨졌으므로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다 보니,

 이런 사례를 겪은 퇴사자가

꽤나 많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퇴사를 하기로 했는데,

회사 측에서 퇴사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계속해서 밍기적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내 경험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니,

어찌 보면 이것도

 회사의 전략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미루다 보면,

굳은 의지도 풀어지며 나태해지고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게 인간의 한계이다.
퇴사하겠다고 이야기 한 순간부터,

업무 관련 문의가 확연히 줄어

업무 강도도 이전에 비해 상당히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회사에 조금 더 남아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사를 나가서

불확실한 상황에 놓일 예정이라면,

이 전략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시간을 끄는 전략은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지능적인 전략이다.

어찌 보면 회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니는 회사도 이런 효과를 기다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퇴사를 결심하는 데에 가장 어려웠던 일은

불확실함에 맞설 수 있는 용기였다.
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결정한 바를

 밀어붙이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부모님과 여자 친구, 심지어는 여자 친구의 부모님까지 설득하려 하니

어려움이 몇 배로 불어났다.
확실히 가장 쉬운 길은

회사에 남아서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퇴사 후의 인생도 문제지만,

퇴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느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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