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밥도둑
나와 남편은 알타리 김치에 있는 무는 좋아하는데 상대적으로 무청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 항상 김치통에는 무청들만 무덤처럼 한편에 소복이 쌓여있다. 엄마가 애써 해 준 것이니 버릴 수도 없고 이걸 어쩌나... 고민을 하다 엄마가 종종 만들어주던 알타리 지짐이 생각났다. 소박하지만 겨울철 굉장한 밥도둑.
무를 다 먹고 나니 또 어느새 무청만 가득 남아버렸다. 김치통도 비울 겸 무청을 모두 골라내 볼에 담았다. 이대로 지지면 칼칼한 지짐이 되지만 나는 맵지 않고 새콤함과 들기름 향이 풍기는 지짐을 좋아하니까 물에 고춧가루를 씻어내기로 했다. 두어 번 정도 씻으면 빨간 양념은 대부분 씻겨나간다.
씻은 무청은 적당한 냄비에 담고 양념을 준비하면 되는데 사실 많은 양념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들기름과 마늘, 신맛을 잡아줄 설탕. 그리고 양념이 씻겨나가며 모자란 간을 보충해 줄 참치액이나 액젓 조금이면 충분하다. 이마저도 간이 맞다면 넣지 않아도 된다.
오래 끓여야 하는 요리를 할 때에는 주로 주물냄비를 사용하는 편이다. 수분 손실도 적을뿐더러 재료들을 맛나게 잘 무르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씻은 무청에 들기름과 설탕 조금, 마늘을 넣고 기름을 무청에 코팅하는 느낌으로 센 불에서 볶아준다. 무청이 어느 정도 나붓나붓하게 숨이 죽으면 물이나 혹은 육수가 있다면 육수를 넣어도 좋다. 다만, 쌀뜨물은 쌀 전분이 섞여있어 끓으면서 걸쭉해지니 피한다.
나는 깔끔하고 개운하게 멸치육수를 사용했다. 집에서 종종 찌개나 국 요리를 해 먹기 때문에 육수를 준비해두는데 기회가 된다면 육수 만드는 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고. 육수는 김치가 무르는 동안 타지 않을 정도의 양만 부어준다. 무청이 너무 두껍거나 살아 있다면 들기름 외에 식용유를 조금 더 넣어주는 것도 김치가 빨리 무르게 하는 방법 중 하나다. 엄마는 종종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육수는 김치가 자박하게 잠길 정도로만 붓고 이제 불을 약하게 내리고 뚜껑을 닫아 숨이 완전히 죽어 무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다림을 동반한다. 온 집안에 들기름 냄새, 김치의 새콤하고 조금은 콤콤한 냄새가 가득해 끼니때가 아니었음에도 뱃속에서는 밥 한 숟가락 했으면 좋겠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각자의 김치가 어느 정도 무른 상태인지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소요된다. 나의 경우는 대략 한 30분 정도를 다른 집안일을 하며 기다리니 딱 먹기 좋을 정도로 물러있어 얼른 냄비를 내렸다. 김이 폴폴, 맛있는 냄새가 솔솔 이거 한 접시면 집나갔던 입맛도 다시 유턴이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따끈하게 갓 지은 밥 한 공기면 된다. 김이 모락모락 구수한 내음을 풍기는 밥 한술 듬뿍 떠서 후후 불어 한 김 식히고 잘 무른 새콤한 무청을 소복이 올려 한 입에 넣으면 입 안으로 갑작스레 퍼지는 뜨거운 기운에 저절로 어깨춤이 춰진다. 입 안에서 밥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식혀먹는 재미에 운이 없다면 벗겨질지 모르는 입천장은 덤이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입맛을 찾아주는 건 사실 대단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요리는 아닐 것이다. 어린 날 친구와 나눠먹던 떡볶이나 멋 부리지 않고 투박한 엄마의 밥상 같은 것. 향수가 있는 음식을 하고 싶다. 먹으면 고이 접어 두었던 어떤 순간들이 떠오르는 음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