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리즈 Oct 13. 2024

내조의 여왕 도전기

남편과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꿈꾸며

2년 전 집에 부부금실이 유별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어느 겨울 쓰레기를 버리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옆집 부부가 산책을 갈 양으로 집 앞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아내를 마주하며 서더니 아내의 머플러를 여미며 행여나 바람이 들어갈까 옷을 단속하는 것이다. 길 한가운데에서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옆집 엄마랑 친해진 그때의 목격담을 말했더니 웃으면서 "남편이 원래 성격이 세심하고 다정다감해요" 한다. 그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어느 주말 밤  앞집, 옆집 엄마랑 셋이 모여 맥주와 함께 수다가 한창이었다. 자연스럽게 남편 이야기로 대화가 흘렀다. 앞집이랑 우리 집은 불통의 '할많하않'의 역사가 깊어가고 있는 처지라 사랑꾼 남편과 애교쟁이 아내인 옆집 부부가 주고받는 애정표현을 신기하고도 재밌게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도 아내 하기 나름'이라며 일명 '내조의 여왕'이라 불리는 지인 이야기를 시작다. 원래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남편인데 아내가 내조를 정말 잘해서 남편이 많이 변했다며,  일례 남편이 퇴근하면 현관에 마중 나가서 "여보, 고생 많았어요. 조금만 쉬고 있어요. 얼른 저녁 준비할게요"하며 귀가한 남편을 환대하고 저녁도 정성껏 차려내며 남편을 극진히 대접하니,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남편이 많이 부드러워졌고 하는 일도 잘 풀린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런 얘길 들으면 '전업주부라 가능하겠지' 하며 워킹맘인 나와는 딴 세상 이야기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날따라 왠지 그 여성분이 너무 훌륭해 보였고 이런 좋은 점은 배워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옆집 엄마가 자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 사람은 이번에 한번 도전 보라며 부추겼다. 무슨 바람이 었는지  앞집이랑 나는 "진짜 한번 해볼까?" 하며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 스타일로 시나리오를 자며 '나는 이렇게 할 테니 너는 이렇게 해'하면서 낄낄대다 엉겁결에 일주일 내에 미션을 수행하기로 약속까지 해버렸다. 


나의 각본은 이랬다.

남편이 도착하면 일단 현관에 나가 마중을 하며 '오늘 고생했지, 내가 저녁 준비할 테니 좀 쉬고 있어' 정도로 어색하지 않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애걔~' 저게 미션이야 하겠지만 사실 결혼 17년 차 맞벌이 부부 우리는 아들 둘을 양가부모 도움 없이 순전히 우리 힘으로 키우면서 아이들 등교 픽업과 하교 후 학원 픽업 등으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있었. 그러니 출퇴근 때도 인사할 여유도 없고 가면 간가 보다 오면 온가 보다였으니 현관에 마중 나가는 자체가 이벤트고, 고생했단 말 또한 둘 다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평상시에 자주 하는 편이 아니어서 조금은 어색했다.


미션 수행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남편은 직장이 멀어 격일로 집에 오고 있는 상황이라 사실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날이 3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 주는 작은애가 갑자기 급체해 광주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질 않나 별스럽게 나흘을 보내고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 채 금요일이 되어버렸다.


금요일, 나는 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그 당시 한창 즐겨 보던 유튜브 방송을 차 안에서 계속 시청하고 있었다. 영화배우 정우성이 출연한지라 입가엔 나도 모를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그때 평소보다 일찍 남편이 도착했다. 차 안에 있는 나를 한번 쓱 보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 현관 마중은 물 건너갔다. 지금이라도 얼른 유튜브를 종료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준비한 멘트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한참 재밌는 방송을 끌 수가 없었다. 졸지에 남편이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차 안에 있는 나를 데리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방송을 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둘러맸다. 그리고 부엌에서 서성이는 남편에게 "내가 저녁 준비할게, 자기는 좀 쉬고 "하며 준비한 멘트를 날렸다. 남편은 좀 멋쩍어하며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더니 이내 다시 식탁 근처로 와 무엇인가를 하려고 서성였다. 이때 나는 각본 상 빠진 멘트가 생각나 "가서 쉬고 있어,  그리고 오늘 고생했어"라며 남은 멘트를 날렸다. 뭔가 좀 부자연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뭐? 나?" 하며 랜다.  너무 의아해하는 남편 반응이 우스워 웃음이 터져버렸다. 혼자 막 웃었더니 남편이 뭐냐며, "뭐 있지?" 한다. 그래서 사실 이만저만했다며 이실직고를 했다. 남편이 싱겁게 웃는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대접도 받아본 사람이 받나 보다. 그 몇 마디가 어색해서 자신한테 한말이 맞는지 놀래는 남편 반응이 귀엽기도 하고 조금 반성도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또다시 살가운 대화 대신 "언능 언능"을 외치며 정신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며  아이들 픽업과 저녁준비로 부부간 교감은 생략 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젠 아이들도 자랄 만큼 자랐으니 아이들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가정의 무게중심을 옮겨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꿈꿔본.  영화 <아무르>의 노 부부처럼 쉼 없이 나누던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를. 


작가의 이전글 나도 스토너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