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밍업은 이제 끝!
아침 6:00
스마트 워치의 진동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아이와 남편이 자는 동안 분주하게 씻고 적당히 배를 채우고,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챙기고 입고 갈 옷을 꺼내놓으면 1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아이를 깨워 아침을 챙겨주고 머리 묶기까지 끝내면 난 집을 나서야한다.
그렇다, 나는 이제 누가 뭐래도 빼도 박도 못하는 워킹맘이 되었다.
45개월을 넘긴 딸아이는 나의 ‘출근’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낯을 가리지도 않았고, 또래에 비해 독립적으로 컸던 아이는 나에게 쿨하게 “잘 갔다와~”라고 손 흔들며 인사해 줄만큼 엄마의 부재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것 또한 참 감사한 일이었다.
순조로울거라 생각하던 그 즈음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아팠다.
개학을 4일 앞두고 아이는 갑자기 고열로 온 몸이 들끓었다.
해열제도 잘 듣지 않고, 약 기운도 오래가지 못해 2시간 간격으로 교차복용하기를 꼬박 이틀.
열이 나는 텀이 점점 길어지긴 했지만 도무지 열이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져갔다.
개학 첫날부터 연가를 쓸 수도, 조퇴를 할 수도 없었다.
워킹맘의 시련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남편은 꼭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아이는 어떻게하냐’부터 시작해 ‘내일이면 괜찮아져? 언제 나아?’와 같은 명의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들까지 던지며 나에게 비수를 꽂았다.
워킹맘에게 가장 큰 고난이자 시련은 아이가 아픈 것이다.
독감도 코로나도 아닌채 열만 치솟는 이상한 증세가 4일 정도 계속되었고, 불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수면 부족으로 꾸역꾸역 이틀간 출근을 하고나니 아이의 증세는 가라앉았다.
“휴, 살았다.” 하고 물에 젖은 솜인형처럼 몸을 좀 뉘인 내 모습이 문득 낯설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워킹맘은 눈치를 볼 것도 챙겨야 할 것도 더 많았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이 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이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았었다는 것이고,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20대 때 나의 직장 상사는 개념없는 말들로 종종 부하직원의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었다.
농담과 진담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망함이나 미안함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는, 다신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때는 감사를 앞두고 부서 구성원 모두가 예민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무개념 발언을 그는 또 배설했다.
나와 동갑인 여자 동료가 임신 중이었고, 감사 기간과 출산 예정일이 겹쳐있었다.
그녀는 감사와 출산 전에 자신이 맡은 모든 일을 완벽히 끝내놓으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말을 들어야했다.
그 상사는 그녀에게 아이를 좀 일찍 낳고, 출산 휴가를 짧게 가지고, 감사 때 복귀하라는 주문을 했다.
뒤에 싸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서야 농담이라는 말로 포장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속담을 통해 배워왔다,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알 낳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양계장의 어미 닭들도 이런 식으로 달걀을 낳진 않을 것이다.
회사를 위해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커야하는 아가를 끄집어내자는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나올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보다 강도가 약한 일들은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고,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한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난 그 정글같은 워킹맘 세계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내가 이 세상을 바꿔놓진 못하겠지만, 내가 듣고 경험한 일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워킹맘의 고충을 공감하고 인정하며, 미미하게나마 글로써 영향력을 발휘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직은 배려심 많은 동료들과 공정하기 그지없는 관리자 분들을 만나 워킹맘의 고충을 느낄 틈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내 앞에 닥쳐올지 모르지만,
어떤 불합리한 일이더라도 당당한 워킹맘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딸의 엄마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