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을 모르는 사람들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얫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백석과 그의 시 중에서도 내가 특별히 아끼는 ‘여승’을 수업 시간에 다루게 되었다.
이 시는 스토리 라인이 있어 굉장히 함축적인 시들에 비해 비교적 해석이 쉬운 편이다.
다만 이 시는 엄청난 감수성을 요하기 때문에 다소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들은 오히려 시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소개하듯이 상황과 장면 묘사에 열과 성을 다했고, 다행히 아이들은 이 시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2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을밤같이 차게 우는 것’이란 대체 어떤 울음인 것인지 아이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차가운 것만 놓고 보면 겨울밤이 훨씬 차가울 것인데 왜 하필 가을밤같이 차다고 비유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
차가운 눈물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고작 10년하고 조금 더 산 아이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급기야 “선생님, 가을밤은 차갑지 않습니다. 더워서 아직도 에어컨 틀고 자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나타났다.
내가 우려했던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쉽게 설명하지 못하게 만든 지구온난화를 원망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가을밤의 쓸쓸함과 서늘함을 느껴보지 못했거나 어쩌면 느낄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겨울밤은 차라리 매섭다는 것도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인 여인네가 자신의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처럼 차가운 눈물을 흘린 이유를
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아이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 적잖이 씁쓸하고 적잖이 안타까웠다.
이게 과연 ‘아직 더운’ 가을밤을 우리에게 보여준 지구온난화의 탓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요 마음을 살찌우는 계절이며,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계절이다.
이 책 읽기 좋은 계절에 단편소설 하나 읽어내는 학생을 찾기가 힘들다.
화면 전환이 빠른 영상 컨텐츠로만 자극을 받다보니 백석의 감수성을 받아들이기엔 역부족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아이들을 포기하기엔 희망의 불씨가 곳곳에 있다.
지난 학기 타 학년의 국어선생님게서 ‘시 낭송하기’를 수행평가 과제로 제출하셨고,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그 과제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시를 낭송하며 오열을 하는 여학생도 몇몇 있었다.
어쩌면 건드리면 톡!하고 분출되어 나오는 감수성은 지금 사춘기인 아이들에게서 가장 이끌어내기가 쉬울지도 모르겟다.
그래서 나는 곧 아이들과 함께할 글쓰기 수업을 구상 중이다.
지구온난화를 탓하지 않고, 나의 가을을 촉촉하게 적셔줄 의외의 감수성을 찾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