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수요일 밤
새벽 5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알람을 끈다. 눈을 다시 감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오늘은 현실이 꿈을 이겼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는다. 슬리퍼를 찾아 신고 핸드폰을 들고 주방으로 향한다. 캡슐 커피를 꺼내 머신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진아 작가님이 배달한 '시'가 도착해 있다.
지난주부터 진아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시 쓰는 가을"에 참여 중이다. 말 그대로 작가님이 아침마다 배달해 주는 시를 필사해서 인스타그램 피드나 스토리에 올리면 된다. 시 쓰는 봄을 시작으로 여름을 지나는 작가님의 시 사랑에 편승해 시 쓰는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며칠 전 배달 된 시는 문태준 시인의 "가을 모과"였다.
가을 모과
-문태준 -
울퉁불퉁한 가을 모과 하나를 보았지요
내가 꼭 모과 같았지요
나는 보자기를 풀듯
울퉁불퉁한 모과를 풀어보았지요
시큼하고 떫고 단
모과 향기
볕과 바람과 서리와 달빛의
조각 향기
볕은 둥글고
바람은 모나고
서리는 조급하고
달빛은 냉정하고
이 천들을 잇대어 짠
보자기 모과
외양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는 모과를 쥐고
뛰는 심장 가까이 대보았지요
울퉁불퉁하게 뛰는 심장 소리는
모과를 꼭 빼닮았더군요
-출처 <먼 곳, 창비> 2012 -
요 며칠 비가 내리더니 필사적으로 여름의 끝을 붙잡고 있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여름과 가을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어제는 여름이, 오늘은 가을이 이긴 모양이다.
아니, 이른 아침엔 가을이었다가 한낮엔 여름이다. 정답게 시간을 나누어 여름과 가을이 하루에 공존한다. 계절이 공존하는 하루는 엄마로서 퍽 난감하다.
"엄마, 오늘 추워?"
"글쎄...."
"오늘도 더울까?"
"글쎄...."
"나시 입고 가도 될까?"
"글쎄...."
결국 아이들은 입고 싶은데로 입고 나갔다가 너무 더워서 힘들거나, 너무 추워서 힘든 하루가 된다.
계절이 공존하는 이때는 어쩔 수 없다. 더위를 견디고, 추위를 견디며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매서운 추위에도 잘 견디는 어른이 될 수 있으니.
노트에 시를 필사하다가 문득, 이곳 밀라노에서 가을을 맞은 지 어느새 두 번째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밀라노에 얼마나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해 이탈리아 말도 배우지 않았고, 정을 붙이지도 못했다. 낯설기만 하던 도시의 모습이 이미 익숙해졌는데도 "언제까지 살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이 우리 삶의 기저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거 때문에 이 나라의 언어와 사람에게 정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1년 넘게 단골인 카페 사장님의 이름도 모르고, 매일 학교 앞에서 마주치는 같은 반 엄마의 이름도 모르는 내 지나친 무심함이 요즘 들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밀라노에서 두 번의 가을을 맞이했다는 말이 이토록 부끄럽게 느껴질 줄 몰랐다.
해외에 산다고 해서 삶의 진폭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더 좁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서 언어를 배우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시계 추의 진폭만큼인 것이다. 환경을 핑계 삼아 매번 같은 길로만 다니고, 같은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매번 같은 사람을 만난다. 나의 진폭은 딱 여기까지인 것이다.
이번 가을엔 나도 모과처럼 울퉁불퉁하게 뛰는 심장을 가져보고 싶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이곳에서 2년째 살아내고 있으니, 나의 지난 시간엔 둥근 볕과 모난 바람과 조급한 서리와 냉정한 달빛이 이미 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길을 걸어보고, 새로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보고, 단골 카페 사장님의 이름을 물어보면서
이번 가을엔 모과처럼 뛰는 가슴을 가져봐야겠다.
새벽 5시에 일어났는데도 아침이 너무 바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책을 읽고, 필사를 하다 보면 새벽의 시간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빠르게 지나간다. 책과 노트를 덮고 엄마의 시간 속으로 풍덩 들어간다. 아침을 준비하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며 엄마의 역할은 가족들보다 한차례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온 집에 가득 퍼진 음식 냄새를 몰아내려 베란다 창을 열었다. 그 사이로 한 뼘 먼저 스쳐 지나가는 가을바람을 붙잡는다.
"얘들아 오늘 조금 춥겠다. 긴팔 입고 가라~"
부디 밀라노에서 두 번째 가을은 천천히 오래오래 달려서 추운 겨울을 천천히 데려오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