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관의 수능 민원 한파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이례적으로 따뜻한 가을이었다.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를 정도로 가을답지 않은 뜨거움을 자랑하며 우리를 혼돈 속에 빠뜨렸던 참 이상한 11월.
우리 학교의 나이가 지긋한 지킴이 선생님께서는 올해 윤달이 있어서 겨울이 늦을거라고 말씀하셨다.
어른들의 이러한 미신같은 말씀은 듣고보면 늘 일리가 있었다. 윤달이 든 해는 1년이 열세 달인 셈이니, 겨울이 한 달 늦게 오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맞으니까.
그렇게 ‘윤달’을 탓하며 차분히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지난 주말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기온은 영하권으로 떨어졌고, 제주도에서는 눈이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갑자기?“라고 말한 뒤 달력을 살펴보니, 급히 추위를 몰고 온 이 날씨가 이해가 되었다.
역시나 미신이겠지만, 아마도 ‘수능 한파’인가보다.
‘수능 한파’는 일종의 징크스다. 수능 당일 또는 수능에 가까운 날에 급작스럽게 기온이 떨어져 한파가 찾아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생긴 전국민 미신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을 3일 앞두고 옷장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드라이크리닝이 된 패딩을 꺼내게 만드는 날씨가 찾아왔다.
11월 초 수능 감독관 선정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생각해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비희망자 신청을 받는다는 전체 메시지를 받았지만 고민 끝에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는 수능 당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능을 앞두고 몇일 전부터 역류성식도염 증상과 감기가 겹쳐 시도때도 없이 기침이 나오고, 목이 쉬는 등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나의 증상들이야 약먹고 시간이 지나 나아지면 그만이지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기침으로 수능 당일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민원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혹여나 내 숨소리가 아이들에게 방해가 될까 숨조차 크게 쉬지도 못하는 그 곳에서 내가 기침을 터뜨리는 일은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며 끊임없이 뜨거운 물과 차, 배도라지즙을 마시고, 저녁 9시부터 잠을자는 등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학생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수능일을 기다렸다.
올해는 ‘수능 한파‘는 없었다. 다소 흐리긴 했지만 포근한 겨울 날씨였다.
아침 5시, 아직은 해가 뜨기 전이지만 부산스럽게 준비하며 고사장으로 향할 채비를 갖췄다.
옷이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니트 종류의 옷을 골라입고,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어그 모카신을 골라 신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루종일 서 있어도 좋을 튼튼한 다리를 이끌고 집 밖을 나섰다.
6시가 막 지난 11월의 아침은 어둡고 고요했다. 고사장까지 가는 동안 차량을 몇 대 보지 못할 정도로 한적해 스산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 벌써부터 교통지도를 나온 경찰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고3 아이들을 위해 우리나라는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날 하루만큼은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몸소 느껴졌다.
남편은 나에게 영어듣기평가는 언제 시작되냐고 물었고, 13시10분부터라고 하자, 12시30분에 김해공항 랜딩인데,
조금 지연이 되면 듣기 평가 시간에 걸려 허공을 배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최대한 지연없이, 최대한 빨리 비행을 마쳐야겠다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출근한 참이었다.
하늘 위 비행기도 멈추게하는 이 굉장한 시험의 생생한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러 간다고 생각하니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캄캄한 겨울 새벽의 바깥 하늘과는 다르게 고사장은 벌써 후끈 달아올라있었다.
고사장 학교에서 준비해 준 김밥으로 아침 끼니를 떼우고, 따뜻한 차와 커피, 다과를 나누며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학교에서는 서로 바빠 미쳐 나누지 못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소재는 자연스레 ‘민원’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수능 뿐만이 아니라 학교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상황과 우발적 사고들, 그에 따른 민원 이야기로 우리는 꽤 심각했다.
수능 전날 연수 때에도, 수능 당일 짧은 브리핑 시간에도 우리의 초점은 ‘민원’에 맞춰져 있었고,
민원 없이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수능 감독 업무를 기피한다. 가장 큰 이유는 ‘민원’이다.
감독관의 작은 움직임이나 소리, 심지어 체취(향기 또는 냄새)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감독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이의 제기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로 소송까지 가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기에, 교사에게 수능 감독은 상당한 부담감과 막중한 책임감을 떠안을 수 밖에 없는 과중한 업무로 느껴진다.
실제 이번 수능 감독을 하며, 한 학생이 자신의 앞에 있는 학생의 주머니가 수상하다며 검사를 요구했고, 감독관이 주머니를 만져보고 뒤져본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한 시험실에서 비슷한 종류의 민원 제기가 3번 연달아 나왔다. 감독관의 긴장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수능 감독관은 수능을 치르는 학생이 편안하고 원활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과 부정행위가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하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하지만 가끔은 감독관이 감독을 과연 잘하고 있는지 수험생이 감독관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게되면 마음이 참 무거워지기도 한다.
지나친 경쟁 사회와 사회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시험’인 탓에 수험생들은 예민하기도, 날이 서기도 한다.
그래서 감독관 역시 마음을 졸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느라 평온하지는 않은 상태가 지속된다.
수험생들은 수능 한파와 킬러 문항이 두렵다면, 감독관은 수능 ‘민원’ 한파가 두려운 셈이다.
어쨋든 우리 모두 마음에 각자의 ‘한파’ 하나씩을 품고 무사히 11월 16일 대수능의 막을 내렸다.
모든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시간, 어두운 하늘에서는 시원하게 비가 내렸다.
이 날의 비는 왠지 그 동안의 마음 고생을 씻겨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씻겨 내려간 만큼 이제 채울 준비로 분주할 그대들을 오늘도 조용히 응원하며,
나는 또 다음 주자들과 함께하러 학교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