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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이 Dec 18. 2023

비염이 가져다준 것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이 많고 흔한 공기 입자들이 내 콧속만 피하는 듯 코 안은 무중력 상태가 된 것 같았다.

괜히 헛기침만 나오고 머리가 띵- 했다.

비염이 시작된 것이다. 또!


작년 이맘때 코로나를 앓고 난 뒤 나는 비염을 달고 살고 있다.

유명하다는 병원에서 약물 치료를 받아보았고, 수술 상담도 받았었고, 한의학을 통한 근본 치료도 겸했고, 민간요법까지 써봤지만 비염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정해놓고 비염 증상이 시작될 것 같으면 달려가 약을 처방받아 온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동네 이비인후과 의사가 꽤 명의인 듯 하다.

우선 과잉 진료가 없고, 다짜고짜 수술을 권하는 대형 병원들과 달리 수술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고, 몇 일 동안 약을 먹으면 호전이 될 것인지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진짜 그만큼만 약을 먹으면 더 이상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될만큼 상태가 좋아진다.

게다가 친절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잘 해줄 뿐만 아니라, 비염으로 인한 삶의 질 하락으로 다소 징징거리는 듯한 나의 하소연 또한 묵묵히 잘 들어주신다.


어쨋든 나는 또 스물스물 올라오는 기분 나쁜 비염의 전조증상을 느끼며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 따라 환자가 유독 많았고, 내 앞으로 대기가 17명이나 있었다.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할 것 같아 병원 한켠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도 보지 않고 책 날개를 펼쳐 작가 소개를 보았다.

읽다보니 뭔가 친근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니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쓰신 책이었다.

이비인후과 의사이지만 걷기에 관련된 글을 썼다는 것이 흥미로워 본격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원장님은 걷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다양한 효과와 영향력, 장점들에 대해 챕터별로 나누어 기록해놓았다.

의학서적이라고 하기엔 덜 전문적이라 왠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걷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님이 쓴 글 같았다.

사실 그래서 나는 술술 읽을 수 있었고, 지루한 대기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원장님의 사생활 얘기도 자주 언급이 되는데, 그 사생활 중 일부를 보고 나는 이 원장님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면 잠에서 깨어 글을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6시쯤이면 첫째 딸이 일어나고, 그럼 딸과의 ‘걷기’가 시작되었다. 1시간 정도 걷고 들어와 아침 식사를 하고 그는 출근을 하고, 딸 아이는 등교 전까지 글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쓴 글이 모여 초등학생인 딸은 벌써 책을 두 권이나 출간했다고도 적었다.

아빠와 걷는 길 속에서 주고받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아이의 글감이 되어주었고, 아이는 고갈되지 않는 풍부한 소재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연필에 모든 걸 맡기고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던 것이다.


책을 읽다 문득 원장님의 딸이 부러워졌다. 과연 딸 아이와 저렇게 밀도있는 시간을 매일 보내줄 수 있는 아빠가 얼마나 있을까?

워킹맘이 면죄부인 양 하루에 책 한권도 겨우 읽어주는 엄마를 둔 내 딸이 애달팠다.

학교 일에 허덕이며 일주일에 내 글 한편 써내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도 한심했다.


환자의 건강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멋짐 그 자체였다.

나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속이 꽉 찬 매 분 매 초를 보내고자 내년 다이어리 속지를 구매하고 목표를 적어보았다.

이 맘때면 늘 그렇듯이 다가올 새해의 소망과 계획들로 설레고 따뜻하다.


비염으로 시작해 비염으로 끝낸 한해였지만, 비염을 계기로 누군가의 삶을 엿보게 되었고, 그 삶을 닮고싶어졌다.

그러니 비염 탓은 이제 그만하고, 난 나의 삶을 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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