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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an 02. 2023

영숙’s answer. 하룻밤 가출

엄마 인터뷰 19차__Q. 진해와 포항에서의 기억은?


 

어떤 사람은 두 살 적 일들도 기억이 난다는데나의 기억은 예닐곱 살부터 조금씩 저장돼 있다그러니 내가 기억해두지 못한 수많은 일들이 종용과 영숙의 머릿속에만 남아있을 것이다그중에서도 내가 태어난 진해와 잠시 살았다던 포항에서 일어난 일들이 궁금했다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므로 이왕이면 내가 모르는 즐거운 일들이 많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Q. 엄마진해랑 포항에서 어떻게 살았어?     

        




우리 둘이 가출했던 얘길 해줄게. 포항에서 한 6개월가량 살았더랬어. 아빠는 이사해 놓고 얼마 안 있어 강화로 전출 가셨어. 전셋집 문제 때문에 우리 둘만 남겨진 거야. 여름에 TV에서 납량특집을 해줬어. ‘V’라는 SF 장르의 미니시리즈였는데 얼마 전에 잠깐 봤더니 유치해. 근데 그때는 얼마나 무섭던지. 아빠가 없으니까 더 무서운 거야. 그렇다고 안 볼 엄마가 아니었지. 그렇게 살고 있었어.     





어느 휴일에 아빠가 오셨어. 또 싸웠어. 뭣 때문이었는지는 생각도 안 나. 우린 시도 때도 없이 싸웠거든. 심할 때는 다음 날 친정으로 가버렸지. 나 못살겠다고. 그러면 친정 부모님들이 달래서 며칠 후에 비행기 표를 끊어서 돌려보냈어.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어.     


이번에도 친정에 가면 또 그럴게 분명해. 저녁 무렵, 아빠가 잠깐 나간 사이 짐을 싸서 나왔어. 가방에 옷을 몇 가지 담고 박스에 네 그림책을 가득 담아 꽁꽁 묶어 들고서. 당분간 책 사줄 여력이 안 될 거 같았거든.    



  


무작정 대구로 갔어. 도착하니까 깜깜해. 우선 여인숙을 찾았어. 골목을 걸어가는데 전봇대에 붙은 작은 전단지가 눈에 띄었어. 어느 공장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내용인데 월급이 얼마라고 적혀 있었어. 기억은 안 나. 방을 잡아 놓았는데 너는 바로 잠이 들었어.     


아기 봐주는 사람에게 너를 맡기면 얼마를 줘야 할까? 월급 받아서 보모에게 돈 주고 나면 둘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 것이다. 겨우 생명 유지나 하기 위해 집 나와 산단 말이야? 아! 밥통 같으니라고. 뒤는 생각도 안 해 보고 덜컥 집을 나왔으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툇마루에 나가 앉아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보고 머리가 지끈거렸어. 잠도 안 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내고 새벽에 잠깐 눈을 붙였어.     





그날 아빠는 강화로 돌아가야만 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부랴부랴 챙겨서 포항 집으로 돌아왔어. 아빠는 얼마나 낙담을 했었는지 풀이 다 죽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마음을 ‘턱’ 놓는 게 보였어.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됐다는 듯, 바로 강화로 가야 한다면서 집을 나섰어. 그렇게 우리의 하룻밤 가출은 끝났어. 다시는 이혼할 생각 말아야지 다짐했어.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진해에 살 때 훈수 두던 동기생 부인과 포항에서도 한 동네에 살았는데, 나보고 도둑년이랬다는 거야. 폐물을 들고 갔다고. 그 얘기를 옆집 여자가 해주네? 아니 그럼 애 데리고 나가는데, 그거까지 놔두고 나가야 돼? 나도 화가 나서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냈어.   

  

어떻게 어떻게 포항에서 강화로 전세가 바뀌었어. 이사를 가야 돼. 아빠가 내려와서 이삿짐을 싸고 용달차에 나란히 탔어. 포항을 떠나는 거야. 한참을 달려가자 우리가 살았던 곳이 멀리 떨어지고 들판이 나왔어. 포항에서의 여러 가지 답답했던 마음까지 멀어지며 티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음이 가벼워졌어.   


  



웃음이 나왔어.

훈수 두던 동기생 부인이랑 잘 지낼걸.

내가 속이 좁았어.

다음에 만나면 잘 지내봐야지.

그러면서 떠났어.


즐거웠던 이야기를 물었더니 하룻밤 가출에 대한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부분이 가장 즐거웠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하고 생각했다포항을 완전히 떠나던 날이었던 것일까정말이지 미칠 것 같던 일들도 어떤 계기로 뱀 꼬리 감추듯 스르륵 사라지는 날들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아는 나이여서, ‘영숙은 그걸 말하고 싶었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 Behind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달래면 돌아올 건데

뭐 하러 자꾸 친정으로 갔어?

그러니까 이번엔 꼭! 

그런 식으로 갔던 건데. 다시 돌아온 거지.     

비행기 표값은 안 비쌌어?

비쌌지. 

돈은 어디서 났어?

아빠 월급이었지.

아빠 화날만하다.

(정적)     





그래도 대단하다. 

엄마 몸집도 작은데,

날 데리고 옷가방만 들어도 무거웠을 텐데,

그림책까지 한 박스를 싸가지고 나가다니.

하하하하하.

대단해 학구열이 대단해.

당분간은 나가면 아무것도 못 살 거잖아. 

그래서 책을 챙겼던 거지.

어떻게 책을 챙기느냐고 쌀을 챙겨야지.

애들 책은 비쌌잖아.

한 권씩 단행본이 아니라 전집으로 나오고 그러니까.

책 사기가 힘들지. 

그래서 전집을 들고나간 거야?

그렇지 전집에서 골라서 담았을 거야.     

엄마가 집 나가면서도 딸내미 책 읽힐 생각을 하니까,

내가 이렇게 다 커서도 책에 파묻혀 사는 거야.

고마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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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호미곶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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