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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돈 Jun 13. 2021

이렇게 봄날은 간다

어젯밤  홀로 기울던 달을 친구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내 젊음의 한 시절을 푸념했다.  술이 덜 깬 마음을 봄바람에 씻어낸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어설픈  더위가 봄날을 밀어내는 날, 목련, 라일락, 진달래 꽃잎 무덤에 조의를 표한다.  봄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검붉은 피를 머금은 장미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움켜쥐고 있던 찬란했던 봄날은 내 사랑을 데리고 저 멀리 한강 위로 날아간다. 시인들의 봄날도, 우리들의 봄날도 그렇게 간다. 대중가수 한영애의 가슴 저린 목소리로 시에 날개를 달은 노래를 듣고 싶다.

(2021.06.13. 맑은 눈)                          


손로원의 (봄날은 간다). 봄은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짧다. 그런데도  연분홍 치마의 계집아이는 봄바람이 났다. 그리고  같이 웃고 같이 울던 맹세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 또한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삶이 곧 봄이다.  봄볕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가버린 흰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두른 그 사랑이 지금도 생각나는지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박달재의 (봄날은 간다). 밀려드는 봄날에 마음을 빼앗긴 건 계집아이만은 아니다.   노총각 역시 가슴앓이 중이다. 인생의 봄날 마음에 담았던 순이는 세월 따라 가버렸단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건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떠나가는 봄이 다시 오면  내 찬란했던 사랑의  반짝이는 그 이름을 다시 흥얼거리겠지.


봄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연분홍 치마뿐이랴

미어터지는 노총각 가슴도 있다

걷는 세월 따라 달리는 나이

사랑했던 <순이>도 갔다.


구양숙의 (봄날은 간다).   예쁘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줄 사람이 그리운 건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봄날이라서 그리운 걸까! 내 마음대로 여닫을 수 없는 내 사랑이 보고 싶다.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꽃나무 아래로

한 걸음에 달려가련다.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


강지원의 (봄날은 간다). 아직은 끝 봄이라고 부르고 싶은 오월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여린 생각도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가는 파도의 포말과 함께 보내야 한다. 서운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투정이다.  돌아보지 말고 오지도 말라는 핀잔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짧은 봄, 가지 말란다.


물집 터진 여린 생각 너는 간다 봄바람아

고운 잇몸 드러내며 까무러친 해안선 너도 가거라

돌아보지 마라

가서는 오지 말거라.


안도현의 (봄날은 간다). 시인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딱딱한 피부로 덧씌워진 살구나무를 본다. 탄력 잃은 살갗을 뚫고 연이어 꽃을 피워내는 현란함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  봄날은 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봄이기에 천천히 가면 좋으련만.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 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김종철의 (봄날은 간다). 시인은 꽃이 피고 또 꽃이 지고 반복되는 봄날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라는 속삭임을 들었나 보다.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하며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일에 흔들리지 말고 그냥 살라고 한다. 아마 그래야 마음을 추슬러 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 깨달음 또한 축복이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혀끝에서 먼저 낙화합니다.


이외수의 (봄날은 간다). 시인은 봄날을 보내며 '파지(破紙)만 가득'한 자신의 삶을 녹여냈다. 내가 쓴 글과 내가 흘린 눈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에 내려앉던 봄날은 제 혼자 살겠다고 언덕을 넘어간다.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글을 써야 한다. 봄을 다시 마주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계절의 여왕 오월을 밟고

잠깐 머물던

화려하고 아름답던 것들의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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