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사과맛이 난다 EP.1 _ 예술을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절규.
아마 뭉크의 이름을 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일 것이다. 음산하고 새빨간 하늘과, 불안한 선들이 난장판으로 그려진. 그리고 그 자리에 서있는 한 사람.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사람은 아마 뭉크겠지. 그의 옆으로 두 명의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아래에 있는 이 그림이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림이 나를 불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불안한 내가 이 작품 앞에서 무작위로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림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이 무척 불편했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맨드레이크를 뽑아서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실 이게 작가의 의도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 그림을 해석해 보면, 사실 절규하는 것은 뭉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뭉크의 절규’라고 알려져서 뭉크가 절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뭉크는 고통스러워하는 입장이다.
"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2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중략)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
이 부분은 뭉크의 일기에서 가져온 내용인데, 글을 읽어보면 뭉크 또한 자연이 소리치는 비명에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사실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은 괴로워서 귀를 가리고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뭉크였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이입이 되어서 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뭉크가 느꼈을 불편과 불안, 그리고 죽음을 나도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뭉크가 대단한 화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외에도 전시회에서는 나의 감각을 사로잡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두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는 키스 연작이었다.
얼굴이 나눠져 있지 않고, 하나로 합쳐진 듯한 이미지를 가운데에 두었다. 그리고 목판 자체의 질감을 먼저 찍은 후에 판을 파서 다시 찍은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목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둔 것. 오랫동안 다져지고 바뀌고 움직이는 나무의 질감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인생의 질감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그 순간이 영원하도록 마블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멈춰있는 시간에서 두 사람의 인생의 흐름이 느껴지고, 합쳐지는 순간이 느껴졌으니.
그리고 두 번째는 병든 아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병에 먼저 죽은 자신의 누나 소피를 그린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연작을 거듭할수록 색감이 달라지거나, 눈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소피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점점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초기 작품인 이 그림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강렬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 그림은 뭐라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거의 감긴 눈과 시선처리가 너무 좋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죽음과 동거하고 있다는 뭉크의 말에 조금 더 공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진리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사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 그림은 어쩌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작은 눈동자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이번에 열린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이라는 전시에서 본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전시에서 느꼈던 생각들이다. 이 전시에서 느낀 생각들을 모두 다 쓰다가는 글이 안 끝날 것 같아서 간단히 두 가지만 적어보려 한다.
1. 무덤으로 가는 길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창백한 시체들.
이 말은 뭉크가 자신의 일기에 적은 문장인데, 이것을 보고 무척 쓰라리고 따가웠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 뭉크는 일찍이 그걸 깨달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갔다. 물론 많이 불안하고, 위태하게 살면서 완벽히 성공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죽음을 직시하라는 말.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젠가는 죽기에, 사실 의미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지, 그리고 죽음 전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충분히 고민하고 활용하라는 말처럼 다가왔다. 현재를 살으라는 말. 그림들을 보면서도 그랬다. 사랑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태어남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현재의 시간을 충실이 느끼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배웠다.
2.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실 굉장히 조심스럽다. 모두가 인정할 예술의 정의는 내릴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만의 정의가 있다면, 나는 ‘감각을 담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라고 압축하고 싶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일단 인간은 세상을 감각한다. 보고, 듣고.. 등등. 그리고 그 감각을 내 안에 담는다. 담는다는 말이 조금 모호해서 설명하기가 난감한데, 생각으로 그 감각을 돌아보고, 다시금 느껴보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렇게 담긴 나의 감각을 어떤 방법으로든 표현한다. 그리고 그 표현을 예술이라 명명한다. 그러면 그건 예술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행위는 예술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조건이 그 표현에 대해 예술이라 명명하는 작업이 되는 것.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을 쓰는 사람이 생각을 글로 적는 것도, 회사원이 PT를 진행하는 것도, 영업직이 발품을 파는 것도.. 그들이 예술이라 정의만 한다면 예술이 되는 것이다. 뭉크 또한, 자신의 불안에 충실하면서. 그리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 파고들면서, 자신의 감정을 담았고, 목판과 석판에 새김으로서 표현했다. 그리고 전시회를 직접 열면서 이 과정을 예술이라 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매너리즘 사조를 예술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뭉크는 자신의 불안을 절규로 방출하지 않았다. 다만 그림으로서 지금까지도 표현 중인 것이다. 뭉크도 감각에 그냥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았고 표현했다. 그렇게 뭉크는 절규가 아닌 예술을 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예술가다. 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듣는 사람도, 그 노래를 들으면 흥을 고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며 타이핑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아침에 일어나 러닝을 하는 사람들도, 사무실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자신의 애인과 몰래 톡을 주고받는 사람들도, 모두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예술하고 있음을 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기에 예술이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이 고상하고 한없이 멀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으로 뭐를 시킬지 휴대폰 위에서 고민의 춤을 추는 손가락도 하나의 예술이다. 고로 우리는 모두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