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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한승 Jul 18. 2024

생각의 기원과 역사

지금은 망원동의 어떤 바에 앉아 있어. 술을 마시려고 왔다기보단 그냥 공간이 좋을 뿐인데, 여기 사람들은 모두 혼자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자기만의 작업을 해. 어둑한 실내와 조용히 깔린 음악. 일렬로 늘어선 테이블에는 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나는 그중 제일 왼쪽 끝자리에 앉았어.


요즘은 이상하게 이런 곳이 좋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동시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절반 정도만 외로운 곳. 왜냐하면, 온전히 혼자 있다는 건 나에게 너무 무서운 일이거든. 머릿속에서 자꾸 질문이 솟아나는데 그게 나를 정말 못살게 굴거든. 그럴 땐 무작정 밖으로 나오곤 해. 물론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요즘은 친구들이 아는 나와 진짜 내 모습 사이의 거리감이 아득하게 느껴져서 조금 곤란하단 말이지. 난 그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자주 질투를 해.


가게에 들어가니 직원 한 분이 나를 기억하고는 반갑게 말을 걸었어. 안 그래도 언제 또 오시나 이따금 얘기했었다고. 이것저것 근황을 묻더니,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저번처럼 위스키를 추천해 주겠다고 하는 거야. 난 와인 마시려고 했는데……. 어쩌겠어, 알겠다고 했지. 그분은 발음도 어려운 어떤 위스키 종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몇 가지 상호명을 읊으며 나에게 여러 설명을 해줬어. 그런데 있잖아. 알아듣지 못하겠는 그 말들이 어찌나 따스하던지……. 이야기들보다 날 향하는 그 목소리가 좋았다. 그렇게 받아 든 위스키 한 모금은 몹시 따끔거리고도 눅진한 맛이었어.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는 건 정말 따사로운 일이지 않아?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했는지 기억하는 것도? 물론 그 사람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건 전혀 아니야. 나도 종종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고서는,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타래들을 도르륵 도르륵 반갑게 떠올리기도 하니까. 세상엔 가끔씩 생각났다 가라앉는 그저 그런 사람들도 많으니까.

근데 말이야, 그래도 나는 너무 신기해.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내 생각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선, 머릿속 깊은 우물에서 기억을 길어낸 다음 한 모금씩 건네어준다는 게. 그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자유롭게 유영을 해. 웃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남이 기억하는 나에 대한 기억 속에서 종종 살아.


요즘, 이미 나에게서 멀어진 사람의 생각을 더 이상 많이 하지는 않아. 대신 다른 사람들 생각을 그만큼 자주 하곤 하지. 부산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생 커플, 유관부서의 말 많은 팀장, 술집에서 잠깐 합석했던 친구의 친구,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간 인터넷 설치 기사님, 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릿속은 여러 사람들로 잔뜩 북적여.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바글대던 사람들은 한두 명씩 집에 돌아가고, 내 생각은 오직 한 명으로 수렴해. 생각을 멈출 수 없는 한 사람. 이게 바로 가장 무서운 순간이야. 난 혼자 누워 있고, 머릿속엔 그 사람이 혼자 있으니까 도저히 어디론가 피할 방법이 없거든. 밤은 이미 깊고 밖은 어둡거든. 일인용 침대 안에서 생각과 질문들은 무한 확장해.

그래 맞아. 사실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상실이라기보단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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