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한승 Jul 18. 2024

육 년 동안 열두 번쯤

어제 나는 너의 장례식에 갔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네 아버지의 장례식이었지. 하지만 나에게 그건 분명 널 위한 자리였어.


사내 경조사 게시판에서 너의 이름 옆에 달린 부친상 소식을 봤을 땐 조금 고민이 됐어. 너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보며 너와의 모든 기억을 꺼내봤다. 우리는 육 년 동안 열두 번쯤 만났고, 가끔 술자리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여러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면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서둘러 내리곤 했고. 이런 관계에서는 직접 가는 게 맞을지 아닐지, 부조금으로는 오만 원이 적당할지 십만 원이 적당할지 가늠해 보다가 그만 지치고 말았어.


사회적 체면과 애도하는 마음이 괴상하게 섞인 고민이 끝나고, 나는 오후 세 시에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섰어. 장례식장은 의왕시에 있어서, 가는 데만 꼬박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리는 곳이었지. 나는 휘적휘적 지하철역으로 향했어.


한낮에 서울에서 경기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본 적 있니? 그곳엔 옅은 색의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느슨하게 넓고 그들의 표정은 권태로워. 열차는 단조로운 마찰음에 우리들을 싣고 가는데,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와 흐릿한 하늘을 구경시켜 주지. 나는 잠깐이나마 어떤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어. 낯선 도시 어디선가에서 슬픔에 잠겨 앉아 있을 누군가를 향하는 여행. 이국적인 지하철 안의 공기는 마음속 고민들을 날려보내고 비로소 너를 떠올리게 했다. 회사로 얽힌 너와의 관계들이 아닌, 오로지 너를 말이야. 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너에게 나는? 그곳에서의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앉아 있을지 나른하게 상상하며 손잡이에 고개를 기댔어. 곧 생각을 멈추곤 책을 펼쳐들었다가, 나는 깜박 잠이 들었어.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이십 분쯤 들어가니 작은 성당이 나왔어. 성당 안에 있는 장례식장이라니. 여러 동의 건물들을 한참 헤매고 나서야 네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지. 고백컨대, 내가 다녀봤던 장례식장들과는 조금 달랐어. 열 개가 되지 않는 근조화환들은 어두운 복도 한편에 줄을 지어 서있었고, 낡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마룻바닥과 작은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지. 거기에 네가 있었어. 둥근 어깨를 늘어뜨리고 등 돌리고 서있는 네가.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긴장했는 지도 몰라. 가장자리가 달아오른 너의 두 눈을 보고는 말이야. 장례식장에 처음 와본 중학생 아이처럼 뻣뻣하게 인사를 하고, 어색한 손짓으로 향에 불을 붙이고, 처음 보는 얼굴 앞에 큰절을 두 번 했지. 그리고 너를 향해서도 큰절 한 번.


식탁에 마주 앉아서야 우리는 제대로 대화를 나눴다. 많은 말이 오가지는 않았는데, 네가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이것저것을 물으면 내가 숟가락을 잠시 멈추고 대답을 하는 식이었어. 어딘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난 너에게 어떤 질문도 쉽게 할 수 없었어. 이런 종류의 큰 슬픔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 걸까. 어쩌면 난, 너에게 그걸 배우고 싶어서 이 자리에 왔는지도 몰라. 너의 벌건 두 눈 사이를 탐색하며, 너는 어느 정도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걸 드러내고 있는지 자꾸만 훔쳐봤어. 글쎄 뭐랄까, 너는 담담히 슬퍼 보였어.

어느샌가 똑같이 검은색 상복을 차려입은 너의 애인이 조용히 옆자리에 앉았어. 그 사람은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도 입이 심심했는지 앞에 놓인 땅콩 과자를 자꾸만 집어먹었지. 너는 그 사람에게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웃어 보였고, 그 사람도 따라 웃었어.


어쩌면 너에게는 그런 사람이 가장 필요할지도 몰라. 같이 상복을 입고 무거운 공기를 견디다가도 서툰 행동 하나로 가벼운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슬픔 앞에서 어두워지지 않는 사람, 슬픔을 잘 다루는 사람. 나처럼 그 무게에 짓눌리기만 하는 사람은 상대를 더 슬프게만 만드는 것 아닐까.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데, 어쩌면 나는 슬픔을 나눠 담을 공간을 마련하기는커녕 다른 종류의 슬픔만 등에 이고 온 건 아닐까.


여전히 한가로웠던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너에 대해 내내 생각했어. 그 담담한 슬픔에 대해서. 너는 네가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하니? 아니 어쩌면 충분한 울음이란 없는 걸까? 눈물은 슬펐던 마음보다 너무 적게, 또는 너무 많게만 흘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왜 슬픔 앞에서는 슬픔이 공명할까.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 안의 슬픔의 무게가 조금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는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어. 어쩌면 내 것일지 너의 것일지 모를 그것들이 서로 모이고 모여, 가장자리를 넘어 또르륵 흘러내릴 지도.


친구야. 어제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이지만 너의 마음이 금방 아물었으면 좋겠어. 어제 미처 덜어주지 못한, 어쩌면 나에게서 너에게로도 조금은 넘어갔을 슬픔의 빚은 앞으로 틈틈이 내 몫을 가져갈게. 건강하자 오래오래. 소소하게 자주 보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생각의 기원과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