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휴대폰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메모장을 켰다.
나에겐 문장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수집벽에 가까운 이 취미 때문에 나는 자꾸만 멈춘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앞에서 마주친 시 한 구절, 잠들기 직전 펼쳐든 책 속 한 문장, 인스타그램 속 '세상이 아직 따뜻한 이유'라는 게시물의 댓글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우연히 마음에 들어온 친구들을 메모장에 꾹꾹 눌러 담고는 번호를 매긴다. 그리고 가끔 하루의 시작과 끝이 내내 아팠던 날에, 침대에 누운 다음 메모장을 켜고 그들을 만난다.
사랑. 내가 사로잡은―어쩌면 내가 사로잡힌― 문장들 중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다. 입술을 앙다물지 않고 한 숨에 내뱉을 수 있는 사랑이란 단어를 사랑한다. 그건 늘 마음속에 범람한다. 이 세상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사소한 수많은 것들에 하루 종일 마음을 주고 마는데도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서 자꾸만 샘솟아 누군가에게로 향하나.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양의 사랑을 돌려받지는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럼 세상이 나에게 작은 빚을 진 건 아닐까, 라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사실 요즘은 내 안의 사랑이 스스로 사라지는 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칼로 자르듯 툭 끊어지는 순간이 아닌, 썰물처럼 내 마음속에서 물러나는 순간. 눈을 꿈벅 감았다 뜨면 코앞에서 파도치던 사랑이 어느새 멀어져 있다. 계기도 낌새도 없었는데 그저 유효기간이 다한 건가. 더욱 사랑하려는 내 노력이 어쩌면 부족했나. 무엇을 사랑하는 내 모습이 그리워 애써 마음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노력할 때, 딱 그 순간 사랑은 정확히 죽는다.
어쩌면 날 향했던 그 사랑도 썰물 같았던 걸 거야. 툭하고 끊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눈 떠보니 아득히 멀리 있어서 너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내 사랑은 아직도 너의 바로 앞에서 파도치고 있다고 증명해 보이려다가, 그러다가는 너의 남은 사랑마저 정확히 죽고 말까 봐 그냥 가만히 둔다. 나는 그저 어쩔 수 없음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무색함을 원망하며 애꿎은 메모장의 화면을 내리고 내린다. 나는 지금 아득히 멀어진 사랑에게 남길 마지막 말을 찾고 있는데, 긴 스크롤의 끝에서 그걸 찾아낸다.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_옛날의 불꽃, 최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