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둑-타닥-탁. 파주의 한 카페 마당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동시에 카페 창가에 앉은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귀에 꽂은 에어팟에서는 가사를 알 수 없는 프랑스 샹송이 흘러나오고, 카페 내부는 적당히 붐비고, 의자와 책상의 높이 간격은 꽤나 만족스럽고, 내 옆옆자리엔 예쁜 하늘색 반팔 니트를 입은 여자가 혼자 책을 읽고. 그러니까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
"늦은 밤 잠에서 깨어~~~~" 이건 파주로 오는 길, 차 안에서 내가 고래고래 따라 부르는 체리필터의 노래. 삼 일 내내 들었더니 코러스까지 죄다 외워버린, 제목도 노래만큼 귀여운 '오리날다'. 자유로의 매끄러운 아스팔트 진동음은 핸들을 잡은 손바닥 안에서 조그맣게 웅웅거리고, 한 주 내내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어쩐지 오늘따라 푸른색 하늘을 조금 더 많이 비추어 주고. 주차장도 필요 없는 넉넉한 도로변에 대충 차를 세워놓고 나오면 발 닿는 어디든 아기자기한 서점들, 카페들, 그리고 소품 가게들. 그러니까 이것 역시 내가 온통 좋아하는 것들.
잠깐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놓고 생각을 헤집어보면, 와구구 떠오르는 행복의 기억들. 둘이 놀러 다니기 바쁘면서 집에 안 놀러 온다고 투정하는 엄마아빠의 전화. 매형이랑 먹어보니 맛있었다며 냉동 소갈비를 보내주겠다는 누나의 문자. 일주일에 꼭 한 번은 밥 먹자고 연락하는 옆 팀 후배들. 유튜브가 우연히 이끈, 오 년 전에 춤을 추며 들었던 노래. 밖이 많이 덥다며 부채를 함께 건네는 작은 책방의 젊은 사장님. 그리고 사소하고 듣기 좋은 소식들로 연락해오는 친구들, 동료들, 오랜 지인들.
난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물론 여전히 슬픈 사람들이 서너 명 나오는 소설. 어딘가 어두운 구석의 대사들을 내뱉는 주인공들이 자꾸만 길을 잃고 헤매는 내용의 짧은 이야기. 그렇지만 이제, 소설답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나는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설렘을 돌려줄 거야. 희망이 사라진 사람에겐 노래를 선물할 거야. 상처가 있는 사람은 따듯한 커피 한 잔과 마들렌 한 조각을 마땅히 건네어받을 거야. 어둡고 깊숙한 절망 끝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가라앉아 있는 이 바닥은 언뜻 보면 깊어 보이지만, 사실 수심 1.8m의 수영장 바닥일 뿐이라 다시 힘차게 발돋움하면 곧 수면 위니까. 가끔은 사위가 어두워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이 되지 않더라도, 곧 머리 위에서 불을 비추어 주는 친구가 소설처럼 등장하기 마련이니까. 어젯밤, 나에게 누군가 그리했던 것처럼.
아직 서툴지만 난 이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있잖아, 봐봐.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은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야. 그저 어딘가 잠들어 있던 원래의 내 마음이야. 그동안 나를 먹이고 재우고 웃겨 왔던, 일상을 움직이는 숨은 메커니즘. 어느샌가 밝은 노래가 귀에 들어오고, 문득 눈에 들어온 노을이 찬란하고, 친구를 불러내고 싶은 술집을 찾아내고. 어색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건 그냥 상처 위에 돋아난 하얀색 새 살이야. 단지 모든 새로운 시작이 그렇듯이, 조금 용기가 필요한 일일뿐이야.
난 이제 이렇게 다짐할 수도 있어. 아직 사랑이란 것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고. 끈적하고 어두운 생각들이 한 겹 걷히고 나니, 그 아래에 조그맣게 잠들어 있었다고. 출처나 이유가 불분명한, 언제 생겨난 지 모를 분홍색 마음 한 조각이. 사랑의 시작은 항상 이렇게 피동적이지만, 물론 그 마지막도 나의 마음같이 되지는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그 과정만큼은 기꺼이 내 스스로.
그 외롭고 아름다운 사랑의 과정 속에서 혼자만의 즐거운 여행을 시작해보자.